초등판 · 쉽게 풀어 쓴 글

장자

장자 (莊子) · 휴담 국역을 초등학생 눈높이로 다시 썼습니다 · 도서관에서 원문 보기 ↗
이 초등판은 『꼭 읽어야 할 고전 선집』에서 읽는 대목만 담았습니다 — 「소요유」 · 「제물론」
이 글을 읽기 전에

이 글은 옛날 중국의 사상가 장자가 쓴 『장자』의 첫 두 편, 「소요유」와 「제물론」입니다. 장자는 커다란 새, 쓸모없는 나무, 나비 꿈 같은 이야기로 생각을 펼칩니다. 사람들이 크고 작음, 옳고 그름을 어떻게 나누는지 묻는 글입니다.

소요유(逍遙遊)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 있다. 이름은 곤이다. 곤이 얼마나 큰지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곤이 모습을 바꾸어 새가 되었다.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도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끝까지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큰 기운이 일면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 한다. 남쪽 바다는 하늘이 만든 큰 못이다. 『제해』는 이상한 일을 적은 책이다. 그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겨 갈 때는 날개로 물을 쳐서 삼천 리나 물결을 일으킨다. 그리고 을 타고 구만 리를 솟아오른다. 여섯 달을 날아간 뒤에야 쉰다.’ 아지랑이와 흙먼지는 살아 있는 것들이 숨을 내쉬어 서로 불어 내는 것이다. 하늘이 파랗고 파란 것은 본래 빛깔이 파래서일까? 아니면 너무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붕이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이처럼 파랗게 보일 것이다. 또 물이 깊게 고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루의 오목한 곳에 물 한 잔을 부으면, 는 배처럼 뜬다. 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바닥에 붙어 버린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바람도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받쳐 줄 힘이 없다. 그래서 구만 리를 올라가야 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깔린다. 그다음에야 붕은 바람을 탄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아무것도 가로막지 않게 된 뒤에야 비로소 남쪽으로 날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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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에 가서 부딪친다.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가고 땅에 떨어지고 만다. 뭐 하러 구만 리나 올라가서 남쪽으로 간다는 거야!” 가까운 들에 나가는 사람은 세 끼 먹을 것만 싸 가도 돌아올 때 배가 아직 부르다.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곡식을 찧어 을 마련한다.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은다. 그러니 저 두 작은 짐승이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앎은 큰 앎을 따라가지 못하고, 짧은 목숨은 긴 목숨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 버섯은 한 달의 처음과 끝을 모른다. 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이 짧은 목숨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오백 년을 봄으로,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 아주 먼 옛날에는 대춘이라는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팔천 년을 봄으로, 팔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그런데 팔백 년을 산 가 요즘 오래 산 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다. 사람들이 그와 견주려 하니, 슬프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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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임금이 신하 극에게 물은 것도 바로 이 이야기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북쪽 끝에 검은 바다가 있다. 하늘이 만든 큰 못이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너비가 몇천 리나 되고 길이는 아는 이가 없다. 이름은 곤이다. 또 새가 있는데, 이름은 붕이다.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붕은 양의 뿔처럼 빙빙 도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솟아오른다.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뒤에야 남쪽으로, 남쪽 바다로 가려 한다. 작은 가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저건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 나는 펄쩍 뛰어올라도 사람 키 몇 배 높이도 못 넘고 내려와. 그러고는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니지. 이것도 날 수 있는 만큼 다 나는 거야. 그런데 저건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다. 어떤 사람은 앎이 한 벼슬을 맡을 만하고, 행실이 한 고을에 어울리고, 덕이 한 임금의 마음에 들어 한 나라의 믿음을 얻는다. 그런 사람도 자기를 보는 눈이 저 메추라기와 같다. 그래서 송영자는 이런 사람들을 빙긋이 비웃었다. 송영자는 온 세상이 칭찬해도 더 애쓰지 않았다. 온 세상이 나무라도 더 기죽지 않았다. 그는 나와 바깥 것을 또렷이 나누고, 영광과 부끄러움의 경계를 가릴 뿐이었다. 그는 세상일에 허둥대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이르지 못한 곳이 있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녔다. 가뿐하고 멋졌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 그는 복을 얻는 일에 허둥대지 않았다. 그는 걸어 다니는 수고는 덜었지만, 아직 기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바람이다. 만약 하늘과 땅의 바른 기운을 타고, 의 변화를 다루며, 끝없는 곳에서 노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는 대체 무엇에 기대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지인은 ‘나’가 없고, 신인은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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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임금이 에게 온 세상을 물려주려 하며 말했다. “해와 달이 떴는데도 횃불을 끄지 않는다면, 그 빛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때맞춰 비가 오는데도 계속 물을 댄다면, 쓸데없는 수고가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 임금 자리에 서시면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스스로 보기에 모자랍니다. 부디 온 세상을 맡아 주십시오.” 허유가 말했다. “그대가 다스려서 세상은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소. 그런데 내가 그대 자리를 대신한다면, 나는 이름을 얻으려는 것이 되오. 이름은 의 손님일 뿐이오. 나더러 손님 노릇을 하란 말이오? 가 깊은 숲에 둥지를 틀어도 나뭇가지 하나면 넉넉하오.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제 배만 채우면 그만이오. 돌아가 쉬시오, 임금이여. 나에게는 온 세상이 아무 쓸모가 없소! 요리사가 음식을 잘 못 만든다고 해서, 제사를 맡은 사람이 제자리를 떠나 술단지와 도마를 넘어가 대신하지는 않는 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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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오가 연숙에게 물었다. “내가 접여에게서 들은 말이 있소. 엄청나게 크기만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소.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말이었소. 나는 그 말이 놀랍고 무서웠소. 은하수처럼 끝이 없고, 보통 사람 생각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소.” 연숙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었나?” 견오가 대답했다. “‘멀리 고야산에 이 산다. 살갗은 얼음과 눈처럼 희고, 처녀처럼 부드럽다. 곡식을 먹지 않고, 바람을 마시고 이슬을 마신다. 구름을 타고 나는 용을 부리며, 온 세상 바깥에서 노닌다. 그의 정신이 한데 모이면, 모든 것이 병들지 않고 곡식이 잘 여문다.’ 나는 이 말이 터무니없어서 믿지 못하겠소.” 연숙이 말했다. “그렇겠지. 눈먼 사람과는 아름다운 무늬를 함께 볼 수 없네. 귀먹은 사람과는 종과 북소리를 함께 들을 수 없네. 어찌 몸에만 귀먹고 눈먼 것이 있겠나? 앎에도 그런 것이 있다네. 이 말은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일세. 그 신인은 그 덕으로 모든 것을 두루 끌어안아 하나로 만들려 하네. 세상 사람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달라고 매달린들, 그가 왜 애써 세상일을 맡겠나!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그를 해치지 못하네. 큰물이 하늘에 닿도록 넘쳐도 빠지지 않네. 큰 가뭄에 쇠와 돌이 녹고 흙산이 타도 뜨거워하지 않네. 그에게서 떨어진 먼지나 쭉정이 같은 찌꺼기로도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빚어낼 수 있다네. 그런 그가 왜 세상 물건 따위를 일로 삼겠나!” 송나라 사람이 을 팔려고 월나라에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 을 해서, 관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 요임금은 온 세상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 안 정치를 고르게 바로잡았다. 그 뒤 멀리 고야산으로 네 신인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분수 북쪽에서 멍하니 자기가 다스리던 세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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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었소. 심어서 길렀더니 다섯 이나 들어가는 박이 열렸소. 거기에 물을 담으려니 너무 약해서 제 무게도 버티지 못했소. 쪼개서 바가지로 쓰려니 너무 넓고 납작해서 담을 데가 없었소. 텅 비고 크기는 했지만, 쓸모가 없어서 나는 깨 버렸소.”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정말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요.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소. 그 집안은 대대로 솜을 물에 빨아 하얗게 바래는 일을 하며 살았소. 한 나그네가 소문을 듣고, 약 만드는 법을 백 금에 사겠다고 했소. 그 사람은 집안사람들을 모아 의논했소. ‘우리는 대대로 솜을 바래 왔지만 몇 금밖에 못 벌었다. 이제 하루아침에 이 기술을 백 금에 팔 수 있으니 넘겨주자.’ 나그네는 그 약을 얻어 오나라 왕을 찾아가 설득했소. 마침 월나라가 쳐들어오자, 오나라 왕은 그를 로 삼았소. 그는 겨울에 월나라 사람들과 물 위에서 싸워 크게 이겼소. 왕은 땅을 떼어 그에게 주었소.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은 똑같은 것이었소. 그런데 한 사람은 그것으로 땅을 받았고, 한 사람은 솜 바래는 일을 벗어나지 못했소.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오. 지금 선생에게 다섯 섬이나 들어가는 박이 있소. 그것을 큰 술통처럼 엮어서 강과 호수에 띄울 생각은 왜 못 하시오? 너무 넓어 담을 데가 없다고 걱정만 하시는구려. 선생은 아직도 쑥대처럼 꽉 막힌 마음을 가지고 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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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큰 나무가 있소. 사람들은 그 나무를 라고 부르오. 큰 줄기는 울퉁불퉁해서 곧은 줄을 칠 수가 없소. 작은 가지는 구불구불해서 자를 댈 수가 없소.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가 거들떠보지 않소.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서,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구려.” 장자가 말했다. “그대는 와 를 못 보았소? 몸을 낮추고 엎드려 돌아다니는 먹이를 노리지요.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며 높은 데 낮은 데를 가리지 않소. 그러다 에 걸리고 그물에 걸려 죽고 마오. 한편 저 검은 들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소. 이 소는 크기는 대단하지만 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오. 지금 그대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다고 걱정이라면,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마을, 끝없이 넓은 들판에 심어 두면 어떻겠소? 그 곁에서 하는 일 없이 거닐고, 그 아래에 누워 느긋하게 노닐면 되지 않소? 도끼에 일찍 잘리지도 않고, 아무것도 그 나무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쓸모가 없다 한들 무슨 괴로움이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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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론(齊物論)

남곽자기가 팔걸이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멍하니 제 몸을 잃은 사람 같았다. 제자 안성자유가 앞에 모시고 서 있다가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은 마른 나무처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마음까지 불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지금 팔걸이에 기대신 분은 예전에 팔걸이에 기대시던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참 좋은 질문이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었다. 너는 그걸 알겠느냐? 너는 사람이 부는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땅이 부는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다. 땅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다!” 자유가 말했다. “그 이치를 여쭈어도 될까요?” 자기가 말했다. “커다란 땅덩이가 내쉬는 숨을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은 불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번 불면 온갖 구멍이 성난 듯 울부짖는다. 너는 저 윙윙대는 소리를 못 들었느냐? 산과 숲이 우뚝 솟은 곳에 백 이나 되는 큰 나무들이 있다. 그 나무의 구멍들은 코 같기도 하고, 입 같기도 하고, 귀 같기도 하다. 받침 같기도 하고, 술잔 같기도 하고, 절구 같기도 하다. 깊은 웅덩이 같기도 하고, 얕은 웅덩이 같기도 하다. 그 구멍들이 콸콸대고, 씽씽대고, 꾸짖는 듯, 들이마시는 듯 소리를 낸다. 외치는 듯, 우는 듯, 깊이 울리는 듯, 새가 지저귀는 듯 소리를 낸다. 앞의 것이 ‘우’ 하고 부르면 뒤의 것이 ‘응’ 하고 따라 부른다. 산들바람에는 작게 치고, 센 바람에는 크게 맞장구친다. 매서운 바람이 그치면 모든 구멍이 텅 비어 조용해진다. 너는 나뭇가지가 흔들흔들,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을 못 보았느냐?” 자유가 말했다. “땅의 피리는 온갖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사람의 피리는 대나무 피리가 내는 소리겠지요. 하늘의 피리는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자기가 말했다. “바람은 만 가지로 다르게 불지만, 저마다 제 소리를 내게 한다. 모두 스스로 그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난 듯 소리 내게 하는 것은 대체 누구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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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앎은 너그럽고 여유롭다. 작은 앎은 자잘하게 따진다. 큰 말은 담담하다.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사람은 잠이 들면 이 뒤엉키고, 깨어나면 몸이 열린다. 그리고 만나는 것마다 얽혀서 날마다 마음으로 다툰다. 어떤 사람은 느긋하고, 어떤 사람은 속을 감추고, 어떤 사람은 빈틈이 없다. 작은 두려움에는 벌벌 떨고, 큰 두려움에는 넋이 나간다. 그 마음이 튀어나올 때는 의 화살이 튀어 나가는 것 같다.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것이다.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는 굳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 같다. 꼭 이기겠다는 고집이다. 마음이 시들어 갈 때는 가을과 겨울 같다. 날마다 사그라지는 것이다. 한번 빠져든 일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마음이 꽉 막히면 꽉 묶어 닫아 둔 것 같다. 늙어서 메말라 가는 것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마음은 다시 살려 낼 수 없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한숨, 과 두려움, 가벼움과 제멋대로 굴기, 꾸밈과 . 이런 마음들은 텅 빈 구멍에서 나오는 음악 같고, 축축한 기운이 피워 낸 버섯 같다. 밤낮으로 번갈아 눈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싹트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만두자, 그만두자! 아침저녁으로 이런 마음이 생기니, 이 마음들이 생겨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으리라! 저 마음들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내가 없으면 저 마음들이 깃들 데가 없다. 이쯤은 참에 가깝다.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시키는지는 알 수 없다. 참된 주인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발자취를 잡을 수가 없다. 하는 일은 분명히 믿을 만한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있기는 한데 모습이 없다. 백 개의 뼈마디,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몸속 기관이 다 갖추어져 몸에 있다. 나는 그 가운데 어느 것과 더 친할까? 너는 그것들을 다 좋아하느냐? 아니면 특히 아끼는 것이 있느냐? 그렇다면 모두를 부리는 하인으로 삼는 것이냐? 그 하인들끼리는 서로 다스리지 못하느냐? 아니면 번갈아 가며 임금과 신하가 되느냐? 그 가운데 참된 임금이 있는 것이냐? 그 참모습을 알아내든 못 알아내든, 그 참됨에는 보탬도 덜함도 없다. 한번 몸을 받아 태어나면, 우리는 죽지 않고 끝날 때를 기다린다. 그동안 바깥 것들과 서로 부딪치고 닳는다. 그렇게 말 달리듯 내달려 멈추지 못하니, 슬프지 않은가! 평생을 아등바등하면서도 이룬 것을 보지 못한다. 지쳐서 고달프게 끌려다니면서도 돌아갈 곳을 모른다. 가엾지 않은가! 사람들이 ‘죽지는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몸이 바뀌면 마음도 따라 바뀌니, 크나큰 슬픔이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본래 이렇게 아득한 것인가? 나만 홀로 아득하고, 남들 가운데는 아득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인가? 제멋대로 굳어진 마음을 따르며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꼭 바뀌는 이치를 알고 스스로 마음으로 깨친 사람에게만 그런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함께 있다. 아직 마음이 서지도 않았는데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어떨까? 그것은 오늘 월나라로 떠나서 어제 도착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신령한 우임금이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 혼자서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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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바람이 부는 소리와 다르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아직 딱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말이 있었던 적이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말이 갓 깬 새끼 새의 지저귐과 다르다고 여긴다. 정말 다른 점이 있을까, 없을까? 는 무엇에 가려서 참과 거짓이 생길까? 말은 무엇에 가려서 옳고 그름이 생길까? 도는 어디에 간들 없겠는가? 말은 어디에 있은들 안 되겠는가? 도는 작은 성공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꾸밈에 가려진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가 서로 옳으니 그르니 다툰다. 상대가 그르다는 것을 옳다 하고, 상대가 옳다는 것을 그르다 한다. 상대가 그르다는 것을 옳다 하고 옳다는 것을 그르다 하려거든, 밝은 눈으로 비추어 보는 것만 못하다. 모든 것은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 것도 없다. 저쪽에 서서 보면 보이지 않고, 스스로 알면 알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도 저것에서 비롯된다.’ 저것과 이것은 함께 생겨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생겨나자마자 죽고, 죽자마자 생겨난다. 된다고 하자마자 안 되고, 안 된다고 하자마자 된다. 옳음이 있어서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어서 옳음이 있다. 그래서 은 이런 길을 따르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 이것도 자연의 옳음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저것이고, 저것이 곧 이것이다. 저것에도 옳고 그름이 하나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저것과 이것의 구별이 있는 것일까? 정말 저것과 이것의 구별이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서로 맞서는 짝을 찾지 못하는 자리, 그것을 ‘도의 ’라고 한다. 지도리가 둥근 고리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면, 끝없는 변화에 다 맞출 수 있다. 옳음도 끝이 없고, 그름도 끝이 없다. 그래서 ‘밝은 눈으로 비추어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장자에게 묻기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깨우치려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말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깨우치려는 것은, 말 아닌 것을 가지고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하늘과 땅도 하나의 손가락이고, 모든 것도 한 마리의 말이다. 옳다고 하면 옳고,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 길은 사람이 다녀서 생기고, 물건은 사람이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왜 그런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 왜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 그렇지 않다. 물건마다 본래 그런 점이 있고, 본래 옳은 점이 있다. 그렇지 않은 물건이 없고, 옳지 않은 물건이 없다. 그러니 가는 풀줄기와 큰 기둥, 병들어 흉한 사람과 미인 , 온갖 괴상하고 이상한 것들도 도에서는 하나로 통한다. 무엇이 나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무엇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에는 이루어짐도 허물어짐도 따로 없이, 다시 하나로 통한다. 오직 두루 깨친 사람만이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늘 그러한 쓰임에 맡긴다. 늘 그러한 쓰임이란 쓸모이다. 쓸모란 통하는 것이다. 통하는 것이란 얻는 것이다. 알맞게 얻으면 도에 가깝다. 자연의 옳음을 따를 뿐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왜 그런지 따지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도라고 한다. 애써 머리를 써서 하나로 만들려 하면서, 그것이 본래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 이것을 ‘’이라고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를 나누어 주며 말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다.”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이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름도 실제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기쁨과 화가 일어났다. 이것도 자연의 옳음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은 옳고 그름을 고르게 어우르고, 하늘의 고름 속에서 쉰다. 이것을 ‘양쪽을 다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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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앎이 아주 높은 곳에 이른 경우가 있었다.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고 여긴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가장 높은 앎이다. 더 보탤 것이 없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경계는 없다고 여겼다. 그다음은 경계는 있지만 처음부터 옳고 그름은 없다고 여겼다. 옳고 그름이 드러나면서 도가 이지러진다. 도가 이지러지면서 한쪽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다면 정말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있는 것일까? 정말 없는 것일까?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있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경우다.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없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지 않는 경우다. 소문은 거문고를 탔고, 사광은 북채를 들었고, 혜자는 오동나무 팔걸이에 기대어 말다툼을 했다. 이 세 사람의 앎은 거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모두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늘그막까지 이름이 전해졌다. 다만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남다르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남에게 밝혀 보이려 했다.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려 했기 때문에, 결국 ‘’을 따지는 어리석은 말다툼으로 끝나고 말았다. 소문의 아들도 아버지의 거문고 줄을 이어받았지만, 평생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도 이룬 것이다. 이런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면, 다른 것도 나도 이룬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을 어지럽히는 번쩍이는 빛을 은 없애려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늘 그러한 쓰임에 맡기는 것, 이것을 ‘밝은 눈으로 비추어 봄’이라고 한다.
장자에게 묻기
이제 여기에 어떤 말이 있다고 하자. 그 말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무리인지, 다른 무리인지 알 수 없다. 같든 다르든 함께 한 무리가 되니, 다른 이들의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도 한번 말해 보겠다. 처음이 있다. 아직 처음이 있지 않은 때가 있다. 그 ‘아직 처음이 있지 않은 때’조차 아직 있지 않은 때가 있다. 있음이 있다. 없음이 있다. 아직 없음이 있지 않은 때가 있다. 그 ‘아직 없음이 있지 않은 때’조차 아직 있지 않은 때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있음과 없음 가운데 정말 어느 것이 있음이고 어느 것이 없음인지 알 수 없다. 지금 나는 이미 무언가를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이 정말 무언가를 말한 것인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 가을 짐승 털끝보다 큰 것은 없고, 은 오히려 작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고, 팔백 년을 산 는 오히려 일찍 죽은 것이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함께 생겨났고, 모든 것은 나와 하나다. 이미 하나가 되었다면 무슨 말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미 ‘하나’라고 말했으니, 어찌 말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나’에 그것을 부르는 ‘말’을 더하면 둘이 된다. 둘에 다시 하나를 더하면 셋이 된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면 셈을 잘하는 사람도 따라잡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야!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셋에 이르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간다면 어떻겠는가! 더 나아가지 말자. 자연의 옳음을 따를 뿐이다.
장자에게 묻기
도에는 처음부터 경계가 없고, 말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런데 옳고 그름을 가리려다 보니 금이 생긴다. 그 금이 무엇인지 말해 보겠다. 왼쪽과 오른쪽이 있고, 차례와 가 있고, 나눔과 가림이 있고, 겨룸과 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덕’이라고 한다. 하늘과 땅과 사방 바깥의 일은 이 그냥 두고 말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 사방 안의 일은 말하지만 따져 가르지는 않는다. 『』가 세상을 다스린 일과 옛 임금들의 뜻은, 성인이 의논하지만 옳으니 그르니 다투지 않는다. 그러니 나누는 데에는 나누지 못하는 것이 있고, 따지는 데에는 따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왜 그런가? 성인은 그것을 마음에 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따져서 서로에게 보여 주려 한다. 그래서 ‘따지는 데에는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큰 도는 이름 붙여 부르지 않는다. 큰 말솜씨는 말하지 않는다. 큰 어짊은 어진 척하지 않는다. 큰 깨끗함은 겸손한 척하지 않는다. 큰 용기는 사납게 굴지 않는다. 도가 환히 드러나면 도가 아니다. 말이 따지기로 흐르면 모자라게 된다. 어짊이 한 가지로 굳으면 두루 이루지 못한다. 깨끗함이 지나치면 믿음을 얻지 못한다. 용기가 사나우면 이루지 못한다. 이 다섯 가지는 본래 둥근 것인데, 자칫하면 모가 나게 된다. 그러니 모르는 데서 멈출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장 높은 앎이다. 말 없는 말솜씨와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를 누가 알겠는가? 만약 이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하늘의 ’이라고 한다. 부어도 가득 차지 않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서 오는지는 모른다. 이것을 ‘감추어진 빛’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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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요임금이 순에게 물었다. “나는 종, 회, 서오라는 작은 나라 셋을 치려 하오. 그런데 임금 자리에 앉아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소. 왜 그렇겠소?” 순이 말했다. “그 세 나라 임금은 아직 쑥대밭 사이에 사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개운치 않으신 것은 왜입니까? 옛날에 해 열 개가 한꺼번에 떠서 모든 것을 두루 비추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해보다 나은 으로 비추신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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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모든 것이 다 함께 옳다고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왕예가 말했다.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선생님은 선생님이 모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그렇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입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그래도 한번 말해 보겠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나?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나? 또 내가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사람은 축축한 데서 자면 허리병이 나고 몸 한쪽을 못 쓰게 되네.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벌벌 떨며 무서워하네. 원숭이도 그런가? 이 셋 가운데 누가 바른 집을 아는가? 사람은 가축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네. 지네는 뱀을 맛있어하고, 올빼미와 까마귀는 쥐를 좋아하네. 이 넷 가운데 누가 바른 맛을 아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짐승과 짝을 짓고, 고라니는 사슴과 어울리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네.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숨고, 새는 높이 날아가고, 사슴은 힘껏 달아나네. 이 넷 가운데 누가 세상의 바른 아름다움을 아는가? 내가 보기에 어짊과 옳음의 실마리, 옳고 그름의 갈림길은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네. 내가 어찌 그것을 가려낼 수 있겠나!” 설결이 말했다. “선생님이 이로움과 해로움을 모르신다면, 도 본래 이로움과 해로움을 모르는 것입니까?” 왕예가 말했다. “지인은 네! 큰 늪이 불타도 그를 뜨겁게 하지 못하네. 큰 강이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하지 못하네. 사나운 천둥이 산을 쪼개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하지 못하네. 그런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타서, 온 세상 바깥에서 노닌다네. 죽고 사는 것조차 그를 바꾸지 못하네. 하물며 이로움과 해로움 따위야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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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제가 저희 선생님 공자께 들었습니다. 은 세상일에 매달리지 않고, 이로움을 좇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얻으려 애쓰며 기뻐하지 않고, 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티끌 같은 세상 바깥에서 노닌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깊고 묘한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장오자가 말했다. “이것은 조차 듣고 어리둥절해할 말이오. 그러니 공자가 어찌 알겠소! 또 그대도 너무 일찍 셈을 하는구려. 알을 보고 벌써 새벽을 알리는 닭을 바라고, 새총 알을 보고 벌써 구운 새고기를 바라는 격이오. 내가 그대에게 아무렇게나 말해 볼 테니, 그대도 아무렇게나 들어 주오.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옆에 끼어 보면 어떻겠소? 모든 것과 한 몸이 되어, 어지러운 것을 그대로 두면 어떻겠소? 낮은 것과 귀한 것을 똑같이 보면 어떻겠소? 보통 사람들은 아등바등 애쓰오. 성인은 어리숙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소. 만 년의 세월을 하나로 꿰어 순수함을 이루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니, 이렇게 서로를 품고 있소. 삶을 기뻐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 아닌지 내가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잃고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소? 여희는 애 땅에서 국경을 지키던 사람의 딸이었소. 진나라가 처음 그녀를 데려갔을 때, 그녀는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울었소. 그런데 왕이 사는 곳에 가서 왕과 함께 좋은 침대를 쓰고 좋은 고기를 먹게 되자, 처음에 운 것을 뉘우쳤소. 죽은 사람이 처음에 살기를 바랐던 것을 뉘우치지 않는지 내가 어찌 알겠소? 꿈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 아침이 되면 소리 내어 우오. 꿈에서 울던 사람이 아침이 되면 사냥을 나가오.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오. 꿈속에서 또 그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난 뒤에야 꿈이었음을 아오. 또 크게 깨달은 뒤에야 이 삶이 큰 꿈이었음을 알게 되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깨어 있다고 여기며, 다 아는 체하오. 임금이니 목동이니 하며 나누니, 참 꽉 막혔구려! 공자도 그대도 다 꿈이오. 내가 그대더러 꿈이라고 하는 이 말도 꿈이오. 이런 말을 ‘아주 이상한 말’이라고 하오. 만 세대 뒤에라도 이 뜻을 풀 큰 성인을 한 번 만난다면, 그것은 아침저녁 사이에 만나는 것만큼 다행한 일이오. 나와 그대가 말다툼을 한다고 해 보오. 그대가 나를 이기고 내가 그대를 못 이겼다면, 그대가 정말 옳고 내가 정말 그른 것이오?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나를 못 이겼다면, 내가 정말 옳고 그대가 정말 그른 것이오?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른 것이오? 아니면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이오? 나와 그대는 서로 알 수가 없소. 사람은 본래 그런 어둠 속에 갇혀 있으니, 누구에게 바로잡아 달라고 하겠소? 그대와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이미 그대와 같으니 어찌 바로잡겠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이미 나와 같으니 어찌 바로잡겠소? 나와도 그대와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이미 우리 둘과 다르니 어찌 바로잡겠소? 나와도 그대와도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이미 우리 둘과 같으니 어찌 바로잡겠소? 그렇다면 나도 그대도 다른 사람들도 다 서로 알 수 없는데, 또 누구를 기다리겠소? ‘로 어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옳음과 옳지 않음, 그러함과 그렇지 않음을 두고 하는 말이오. 옳음이 정말 옳다면, 옳음이 옳지 않음과 다르다는 것은 따질 것도 없소. 그러함이 정말 그러하다면, 그러함이 그렇지 않음과 다르다는 것도 따질 것이 없소. 바뀌는 소리들이 서로 기대는 것은, 서로 기대지 않는 것과 같소. 자연의 결로 어우르고 끝없는 변화에 맡기면, 타고난 목숨을 다 누릴 수 있소. 세월을 잊고 옳고 그름을 잊으면, 끝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떨치게 되오. 그래서 끝이 없는 곳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오.”
장자에게 묻기
옅은 그림자가 짙은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자네가 걷더니 지금은 멈추었네. 아까는 앉아 있더니 지금은 일어섰네. 어찌 그리 가 없는가?” 짙은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무언가에 기대어서 이러는 것인가? 내가 기대는 그 몸도 또 다른 무언가에 기대어서 그러는 것인가? 나는 뱀의 이나 매미의 날개에 기대는 것인가? 왜 그런지 어찌 알며, 왜 그렇지 않은지 어찌 알겠는가?”
장자에게 묻기
언젠가 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자기가 장주라는 것도 몰랐다. 문득 깨어 보니 틀림없는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히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가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라고 한다.
장자에게 묻기

초등판은 휴담 국역을 바탕으로 초등학생이 혼자 읽을 수 있게 다시 쓴 글이며, 쓴 사람과 다른 검토자가 원문과 대조해 확인했습니다. 원전 그대로의 글은 「원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