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판 · 쉽게 풀어 쓴 글

목민심서

정약용 (丁若鏞) · 휴담 국역을 초등학생 눈높이로 다시 썼습니다 · 도서관에서 원문 보기 ↗
이 초등판은 『꼭 읽어야 할 고전 선집』에서 읽는 대목만 담았습니다 — 율기 청심 · 애민(총론·양로·자유)
이 글을 읽기 전에

『목민심서』는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쓴 책입니다. 다산은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1818년 무렵 이 책을 마쳤습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백성을 돌보고 일해야 하는지 적으려고 쓴 책입니다.

율기 6조 제2 ○ 청심(淸心) 율기 제2조

제2조 — 마음을 맑게 하기 (몸가짐 다스리기 여섯 가지 가운데 둘째)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은 이 해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일입니다. 모든 착한 일이 여기서 나옵니다. 모든 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청렴하지 않으면서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우리 나라 에서 로 뽑힌 사람은 모두 110명뿐입니다. 태조 임금 때부터 뽑힌 사람이 45명입니다. 중종 임금 때부터는 37명, 인조 임금 때부터는 28명입니다. 경종 임금 뒤로는 이 일이 아예 끊겼습니다. 그러자 나라는 더 가난해지고 백성은 더 살기 힘들어졌습니다. 어찌 한숨이 나지 않겠습니까. 400여 년 동안 관복 띠를 매고 조정에 선 사람은 수천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백리로 뽑힌 사람은 이 숫자뿐입니다. 이것은 선비 벼슬아치들의 부끄러움이라 하겠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선생님과 함께 읽어요
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청렴에는 세 이 있다. 가장 높은 청렴은 이렇다. 나라에서 주는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먹고 남은 것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날에는 말 한 마리만 타고 쓸쓸히 떠난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청렴한 관리이다. 그다음 등급은 이렇다. 봉급 말고도 까닭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는다. 먹고 남은 것은 집으로 보낸다. 이것이 조금 옛날에 말하던 청렴한 관리이다. 가장 낮은 등급은 이렇다. 이미 늘 해 오던 일이면 까닭이 바르지 않아도 먹는다. 늘 해 오던 일이 아니면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나쁜 일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고을의 자리나 일자리를 돈 받고 팔지 않는다. 재해를 핑계 삼아 훔치거나 곡식 장부를 뒤집어 속이지 않는다. 재판이나 죄인 다루는 일을 돈 받고 팔지 않는다. 세금을 더 걷어서 남는 것을 훔치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청렴한 관리이다.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사람은 오늘날 흘러넘치는 물처럼 많다. 가장 높은 청렴을 할 수 있다면 참 좋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다음 등급이라도 해야 한다. 가장 낮은 등급 같은 사람은 옛날 같았으면 꼭 삶아 죽이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 착한 일을 즐기고 나쁜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양병은 청렴하고 하며 꾸밈없이 깔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주, 형주, 서주, 연주, 네 고을을 차례로 다스렸습니다. 일한 날수를 세어 그만큼만 봉급을 받았습니다. 남은 봉급은 자기 집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밥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흔들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술과 여자와 재물이다.” 그는 시대 양진의 아들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상의공 산운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청렴하고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지방의 장군 관청에 정뢰라는 늙은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곧아서 바른말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산운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 되면 욕심을 부려도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나도 욕심을 부려도 되겠느냐?” 정뢰가 대답했습니다. “공께서 처음 오셨을 때는 새하얀 새 옷 같았습니다. 먹물이 한 점만 묻어도 끝내 씻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산운이 또 물었습니다. “이곳 부족 사람들이 보내는 선물을 받지 않으면, 그들이 꼭 의심하고 화를 낸다고 한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정뢰가 말했습니다. “벼슬하면서 재물을 탐하면 나라에는 무거운 법이 있습니다. 나라는 두려워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부족 사람들을 두려워하십니까?” 산운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광서를 지켰습니다. 그동안 청렴한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청렴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장사꾼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아주 큰 사람은 꼭 청렴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까닭은 생각이 짧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진 사람은 어짊을 편안하게 여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청렴한 사람은 청렴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청렴을 이롭게 여긴다고 말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재물은 사람이 크게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물보다 더 크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버리고 갖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청렴한 관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집안이 훌륭하고 재주와 이름이 높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돈 몇백 때문에 무너지는 일을 자주 봅니다. 벼슬을 빼앗기고 먼 곳으로 을 갑니다. 10년 동안 다시 벼슬을 얻지 못합니다. 힘이 세고 운이 좋아서 벌을 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욕하고, 좋은 이름은 무너집니다. 이 때문에 글 맡은 관리는 나라의 높은 글 관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군대 맡은 관리는 장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지혜가 넓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바라는 것이 큽니다. 그래서 청렴한 관리가 됩니다. 지혜가 좁고 생각이 얕은 사람은 바라는 것이 작습니다. 그래서 욕심 많은 관리가 됩니다. 이 점을 깊이 헤아린다면, 청렴해지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송나라의 한 시골 사람이 밭을 갈다가 을 얻었습니다. 그는 높은 관리 자한에게 그 옥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자한은 받지 않았습니다. 시골 사람이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시골 사람에게는 보물입니다. 부디 님께서 받아 주십시오.” 자한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옥을 보물로 여기지만, 나는 받지 않는 것을 보물로 여기오. 내가 이것을 받으면 그대와 나 모두 보물을 잃게 되오.” ○ 공의휴가 노나라의 재상이었을 때, 한 손님이 물고기를 선물했습니다. 공의휴는 받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물었습니다. “대감께서 물고기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데 왜 받지 않으십니까?” 공의휴가 말했습니다. “물고기를 좋아하니까 받지 않는 것이오. 지금은 재상이라 내 힘으로 물고기를 사 먹을 수 있소. 그런데 물고기를 받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면, 누가 다시 내게 물고기를 주겠소? 그래서 받지 않는 것이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양진이 탁군의 가 되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청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일을 벌여 재산을 늘리라고 권했습니다. 양진은 싫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뒷날 사람들이 내 자손을 ‘청백리의 자손’이라 부르게 하겠소. 이것을 물려주는 것도 넉넉한 일이 아니겠소?”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그래서 옛날부터 지혜가 깊은 선비는 모두 청렴을 늘 가르침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욕심 부리는 것을 늘 조심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배협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청렴은 벼슬하는 일의 바탕이다. 검소는 제 몸을 지키는 터전이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율기〉이라는 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선비가 청렴한 것은 여인이 몸가짐을 깨끗이 하는 것과 같다. 털끝만 한 얼룩이라도 묻으면 평생의 흠이 된다. 어두운 방이라서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지 마라. 환하게 다 아는 넷, 곧 ‘’이 있다. 네가 너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해도, 네 마음속 밝은 신령을 어찌 속이겠느냐. 황금 대여섯 짐과 후추 800이 있다고 하자. 살아서는 자랑거리가 되기에 모자란다. 천 년 뒤에는 오히려 벌만 남을 뿐이다. 저 훌륭한 사람에게는 학 한 마리와 하나뿐이다. 바라보면 늠름하고, 그 맑은 바람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포효숙공()은 집안에 이런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뒷날 자손 가운데 벼슬을 하며 을 받거나 욕심을 부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본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죽은 뒤에도 조상들 무덤 곁에 묻지 마라. 내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 자손이 아니다.” 그는 그 아래에 자기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포공에게 이 글을 돌에 새기게 했습니다. 집 안채의 동쪽 벽에 새겨 뒷날까지 알리게 한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나경륜이 말했습니다. “벼슬하는 선비가 돈 한 을 아끼면, 그 사람은 한 푼 값어치도 없다.” 진간재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름난 선비는 을 쓰지 않았다.” 양백자가 말했습니다. “벼슬하는 선비가 청렴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70%는 된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풍유룡이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못난 일이 끝없이 많은데, 모두 돈이 아까워서 내놓지 못해 생긴다. 세상에는 좋은 일도 끝없이 많은데, 모두 돈을 아끼지 않고 내놓아서 이루어진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정선이 말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 때문입니다. 욕심 없이 소박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세상의 재물과 이익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대나무 울타리와 초가집은 돈을 헛되이 쓰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바른 길을 이야기하는 데는 돈을 구하지 않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남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면 돈이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지키고 살피면 세상 욕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욕심내는 마음이 또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정선은 또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치스러운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고향에 옵니다. 그러고는 옛 책을 공부한 덕이라고 크게 자랑합니다. 바닷가 먼 고을의 을 캐물으며, 벼슬아치 주머니를 채울 밑천으로 삼으려 합니다. 가끔 샘물만 마시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낡은 수레와 여윈 말을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웃으며 말합니다. ‘왜 그렇게 못나게 벼슬을 하는가? 좋은 벼슬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것일 뿐이다.’ 아, 저도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가 죽은 지 몇 년 안 되어 자손들이 재물을 두고 다투다 망했습니다. 또 두 도 못 가서 자손들이 놀기만 하다가 집안을 무너뜨렸습니다. 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데만 마음을 둡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긁어내는 솜씨는 뛰어납니다. 그런데 남이 그를 ‘수레 열 대를 가진 부자’라고 하면 화를 내며 얼굴빛이 바뀝니다. 남이 ‘쌀 한 항아리도 모아 둔 것이 없다’고 칭찬하면 기뻐합니다. 그 자손이 남에게 할아버지의 일생을 글로 써 달라고 부탁할 때도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를 위손이나 같은 무리에 견주어 깎아내리면 화를 냅니다. 공의휴나 양진과 나란히 놓으면 기뻐합니다. 이것은 돈이 많은 것이 부끄럽고, 못나 보여도 청렴한 것이 귀하다는 것을 잘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두는 것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귀하게 여기는 것도 흔히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단 말입니까.”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정선이 말했습니다. “요즘 선비 벼슬아치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공과 이름을 낚고, 속으로는 재산을 늘립니다. 넓은 집이 천 칸이고, 기름진 밭이 만 입니다. 남자 하인은 개미처럼 많고, 여자 하인과 은 구름처럼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사람의 본성과 하늘이 준 목숨을 고상하게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마음이 맑고 비어 있다고 뽐냅니다. 그런 사람이 혀로 빛 보배 연꽃을 토해 낸다 해도 저는 믿지 않겠습니다.” 또 말했습니다. “벼슬아치들은 벼슬 명단에 한번 이름이 오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부자가 됩니다. 이익이 많고 벼슬이 높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가난하고 검소하게 벼슬을 지키면 겨우 비웃음만 피합니다. 공평하고 청렴하고 곧아서 벼슬과 이익을 둘 다 잃으면 ‘아주 못난 사람’이라 부릅니다. 아내와 자식은 그를 원망하고, 친척과 친구는 그를 비웃습니다. 고향에도 몸 둘 곳이 거의 없게 됩니다. 하늘이 내린 높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바람 따라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드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송나라의 개거원이 이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관청 마당에서 비단을 사면서 손수 길이와 폭을 쟀습니다. 곁에서 시중들던 여종이 틈으로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종은 싫어하며 말했습니다. “오늘 뜻밖에 비단 장사꾼을 모시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러고는 떠나겠다고 해서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에도 한 현령이 관청 안에서 손수 자로 베 길이를 쟀습니다. 어느 시대엔들 어진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석박은 40년 넘게 벼슬을 했는데, 하루같이 청렴하고 곧았습니다. 고향 사람 가운데 전사라는 낮은 벼슬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박이 그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은그릇이 놓여 있고, 금잔이 열 개 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석박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벼슬한 지 몇 해나 되었나?” “아직 일솜씨를 평가받는 기한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돌아왔나?” “못된 백성들이 제가 욕심을 부렸다고 해서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석박이 말했습니다. “슬프구나! 내가 자네를 다스렸다면, 자네가 어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겠나!” 그러고는 옷자락을 떨치고 가 버렸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복건 지방에서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던 도후중이 그 지방의 으뜸 관리 설대방을 고발했습니다. 설대방이 욕심 많고 사납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설대방은 도리어 도후중을 거짓으로 고발했습니다. 도후중이 서울에 가자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설대방은 벌을 받았고, 임금은 도후중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복건 사람들이 마중 나와 절하며 말했습니다. “도 나리가 다시 오시니 하늘에 눈이 있구나. 설 공이 떠나지 않았다면 땅에 가죽도 남지 않았으리라.” 송나라의 미신은 검소했고 돈을 몹시 아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돈을 백만 나 쌓아 두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돈을 펑펑 쓰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잣집에서 비싼 를 주고 돈을 빌려 썼습니다. 그는 이것을 ‘노도환’, 곧 ‘늙은이가 쓰러지면 갚는다’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죽어 장례 종소리가 그치면, 빌린 돈과 이자를 한꺼번에 갚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들은 몰래 하인들을 모으고 말안장과 옷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그들을 대문 양옆에 세워 두고 아버지가 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을 나서면 곧바로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나갔습니다. 그 무리는 서울에서 말솜씨로 먹을 것을 얻어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신이 죽자마자 아들은 재산을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끝내는 밤에 종을 흔드는 들의 일을 빌려 겨우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도둑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가 마을을 지나가면 사방에서 더러운 욕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 또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정선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고을 이 도둑을 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도둑질한 일을 스스로 말해 보아라.’ 도둑이 모르는 척하며 물었습니다. ‘무엇을 도둑이라고 합니까?’ 수령이 말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도 모른단 말이냐? 남의 상자를 열고 재물을 훔치는 것, 그것이 도둑이다.’ 그러자 도둑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리 말씀대로라면 제가 어찌 도둑이겠습니까? 나리 같은 관리들이야말로 진짜 도둑입니다. 선비들은 글방에서 글을 읽고 과거 시험 답안이나 외웁니다. 옛날과 지금을 살펴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따져 보지 않습니다.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권력을 손에 쥐는 것뿐입니다. 그 힘을 빌려 큰 이익을 움켜쥐려 합니다. 아버지와 스승이 가르친 것도, 친구들과 배운 것도 모두 도둑질 연습입니다. 관복을 입고 을 쥐고 대청 위에 높이 앉습니다. 들은 양옆에 늘어서고 하인들은 아래에서 받듭니다. 그 위엄이 하늘의 임금 같습니다. 벼슬은 이익을 따라 생기고, 나랏일은 뇌물로 이루어집니다. 곽거 같은 힘센 사람이 대낮에 사람을 죽여도, 뇌물 한 번 넣으면 법이 어디 있습니까? 황금이 힘을 가지니 밝은 해도 빛을 잃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풀려나 마을에서 뽐내며 다닙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벌금을 내느라 가난과 고통에 시달립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살갗이 벗겨지며 집도 지키지 못합니다. 끝내 아내와 자식까지 팔고, 바다에 빠지거나 구덩이에 묻혀도 아무도 걱정해 주지 않습니다. 신령은 화내고 백성은 원망합니다. 그래도 돈의 힘은 하늘까지 닿아서 관리의 이름은 크게 높아집니다. 큰 집들은 구름에 닿을 듯 늘어서고, 음악 소리가 땅을 울립니다. 하인은 벌 떼처럼 많고, 예쁜 여인들이 방에 가득합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큰 도둑입니다. 땅을 파고 처마를 뚫어 남의 돈 한 푼을 훔치면 곧바로 도둑으로 벌합니다. 그런데 관리들은 높이 앉아 팔짱을 낀 채 수만 금을 긁어모아도 좋은 관리라는 이름을 잃지 않습니다. 큰 도둑은 묻지 않고, 동네의 거지 아이나 좀도둑만 심문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관리는 멋쩍게 웃으며 그 도둑을 풀어 주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고려의 나득황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세금을 심하게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자 최항에게 해 그 덕에 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송소가 제주를 다스리다 뇌물죄로 쫓겨난 일이 있었습니다. 나득황이 오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제주가 전에는 좀도둑을 겪더니, 이제는 큰 도둑을 만났구나.”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이기가 쓴 《동각잡기》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함경도는 들과 이웃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을을 다스리는 크고 작은 을 늘 무관 가운데서 뽑아 보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아주 멀어서 두려워하거나 조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무서운 벌과 무거운 세금 걷기만 일삼았습니다. 가끔 문관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름난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수령들을 ‘낮도둑’이라고 불렀습니다. 북쪽의 한 백성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습니다. 그는 앞에 이르러 함께 가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기는 어느 고을 관청이오?’ 함께 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기는 인데, 소매 긴 낮도둑들이 모이는 곳이라네.’ 이 말이 너무 화가 나서 한 말이긴 합니다. 그래도 듣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만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한암쇄화》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련사에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시 한 구절을 읊었습니다. ‘ 그늘 아래에는 큰 도둑이 많고, 소리 속에는 참된 스님이 적구나.’ 이것은 가 욕심이 많다는 말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을 주고받는 일은 누구나 몰래 합니다. 하지만 한밤중에 한 일도 아침이면 이미 다 알려지게 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들은 아주 가볍게 행동합니다. 그들은 방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은 비밀이라 아무도 모릅니다. 소문이 나면 저도 해를 입는데, 누가 소문을 내겠습니까?” 은 그 말을 굳게 믿고 기쁘게 뇌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전은 문을 나서자마자 이 일을 숨김없이 떠벌립니다. 자기와 맞서는 사람을 꺾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온 고을에 소문이 퍼집니다. 그런데도 목민관은 깊은 방에 홀로 있어서 까맣게 모릅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양진이 말한 ‘’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양진이 형주로 있을 때 일입니다. 그가 인재로 추천한 왕밀이 창읍의 이 되었습니다. 왕밀이 밤에 금 10을 품고 와서 양진에게 바치며 말했습니다. “깊은 밤이라 아무도 모릅니다.” 양진이 말했습니다. “하늘이 알고, 신령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가?”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에 나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손신과 황보는 에서 함께 공부한 옛 친구였습니다. 황보가 가 되어 처주로 나갔을 때 일입니다. 한 이 황보에게 뇌물을 주려고 손신을 통해 건네려 했습니다. 손신이 말했습니다. “아예 말도 꺼내지 말게. 내 귀에 들리게 하지 말게. 이것은 귀로 들어오는 뇌물이라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보내오는 선물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이 한번 생기면, 이미 사사로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격현의 원의는 임금 곁에서 나랏일을 하는 신하들에게 뇌물을 주어 좋은 평판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는 산타오에게도 백 근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산타오는 혼자만 다르게 굴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뒷날 원의가 저지른 나쁜 일이 드러났습니다. 산타오는 대들보에서 명주실을 내려 관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실에는 먼지가 쌓여 누렇고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봉하고 도장 찍은 자리는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양속이 여강의 가 되었을 때, 이 물고기를 선물했습니다. 양속은 받았지만 먹지 않고 매달아 두었습니다. 뒷날 부승이 또 물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양속은 전에 매달아 둔 물고기를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부승은 부끄러워하며 다시는 물고기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웅태간 공은 평생 청렴한 마음을 지켜 풀 한 포기도 함부로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운남 지방을 돌보며 남쪽 부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라 잔치가 열린 날, 공은 금꽃과 비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다음 해에 공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담당 관리를 불러 금꽃과 비단을 넘겨주고 창고에 넣게 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공은 자기의 청렴 때문에 남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공이 받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일은 장괴애가 시녀를 받았다가 돌려보낸 일과 꽤 닮았습니다. 조극명이 호광 지방 관청에 있을 때 일입니다. 한 가 한 상자를 보내왔습니다. 조극명은 봉한 것을 미처 뜯지 않고 상자 속에 대충 넣어 두었습니다. 뒷날 꺼내 보니 그 안에 세 이 섞여 있었습니다. 공은 놀라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그는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본 것인가?” 그때 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불러 돌려주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엽종행이 전당현의 으로 있을 때 일입니다. 주신은 생김새와 위엄이 엄했는데, 엽종행을 특히 아꼈습니다. 주신은 엽종행이 밖에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그의 집에 갔습니다. 방 안을 살펴보니 쓸 만한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립택에서 나는 말린 한 꾸러미뿐이었습니다. 주신은 한숨을 쉬며 그것을 조금 가지고 나왔습니다. 다음 날 주신은 엽종행을 불러 그것을 대접하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대 집 물건이오.” 그때 사람들은 그를 ‘전당의 ’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의 소경이 남청하의 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청렴하고 조심스러워서 오이나 과일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고을 사람 조영이 햇오이 두 개를 바쳤습니다. 소경은 그것을 대들보 위에 올려 두고 끝내 잘라 먹지 않았습니다. 가욱이 선유현으로 자리를 번역했을 때 일입니다. 고을의 한 손님이 과일을 보냈지만, 가욱은 받지 않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송나라의 사도가 고을을 살피러 나간 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좋은 대추가 열려 있었습니다. 따라온 사람이 그것을 따서 바쳤습니다. 사도는 곧바로 대추 값을 셈하여 나무에 돈을 걸어 두고 떠났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청렴한 관리가 귀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산과 숲, 샘과 돌이 모두 맑은 빛을 입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오은지가 광주의 가 되어 가는 길이었습니다. 산해군에서 20쯤 떨어진 곳에 ‘’이라는 샘이 있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꼭 욕심쟁이가 된다는 말이 전해 왔습니다. 오은지는 망설이지 않고 물을 떠 마셨습니다. 그런데 청렴한 마음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돌아갈 때는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상서가 되고 태복으로 올라서도 대나무 거적을 병풍으로 썼습니다. 식구들은 이틀에 한 끼를 먹으면서도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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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이백이 우성현의 이 되었습니다. 관청 집의 오래된 우물은 물이 맑았지만 맛이 썼습니다. 이백은 처음 와서 그 물을 맛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도 쓰고 맑으니, 내 뜻과 꼭 맞는구나.” 그는 끝내 물 긷는 곳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물물이 달콤한 샘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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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은 자기가 사는 집 동북쪽에 우물 하나를 팠습니다. 우물이 다 되자 을 입고 향을 피우며 빌었습니다. “제 자손들이 벼슬을 할 때, 이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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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방표가 낙릉군을 다스릴 때 일입니다. 그곳은 모두 바다에 붙어 있어서 물맛이 짰고 단물이 없었습니다. 방표가 우물 하나를 파게 하자 마침내 단 샘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방표가 떠나자 단 우물이 다시 짜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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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우원이 진안의 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바닷가에 월왕석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었습니다. 청렴한 태수라야 그 바위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 왔습니다. 우원이 가서 보니, 바위가 맑고 또렷해서 가려진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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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재가 여릉의 에게 시를 지어 주었습니다. “지금 태수님은 얼음과 처럼 속까지 맑으시네. 여릉 쌀은 한 톨도 씹지 않으시고, 찻잎 한 싹도 맑은 샘물에만 끓이시네. 하늘의 옥황상제도 그대가 좋은 관리임을 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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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에서 나는 귀한 물건은 꼭 그 고을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지팡이 하나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 비로소 청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강계의 인삼과 가죽, 함경도 북쪽 경북의 와 베, 남평의 부채, 순창의 종이가 있습니다. 담양의 색칠한 상자, 동래의 담배 도구, 경주의 , 해주의 먹, 남포의 벼루도 있습니다. 돌아가는 날 짐 속에 이런 것을 하나도 지니지 않는다면 청렴한 선비의 행동입니다. 귀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습니다. 그들은 그 물건들을 좌우에 늘어놓습니다. 욕심 많고 천한 얼굴빛이 속에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보는 사람이 대신 부끄러워질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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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향산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주에서 오래 벼슬을 했다. 하지만 의 돌은 한 조각도 집에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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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 대리부에서는 돌병풍이 납니다. 그곳의 관리가 된 사람들은 늘 백성을 고생시키고 재물을 써 가며, 이것을 실어다 남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이방백만은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시에 자기 뜻을 담았습니다. “서로 그리워도 돌병풍은 선물로 보내지 마오. 남쪽 땅에 남겨 두고 좋은 정치를 기리는 비석이나 새기게 하오.” 하남 지방에서는 버섯과 이 납니다. 벼슬하는 사람들은 늘 이것을 가져다 힘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우숙민공은 그 지방을 돌보며 다스릴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손수건과 버섯과 선향은 본래 백성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인데 도리어 이 되었구나. 맑은 바람만 두 소매에 가득 담아 으로 가니, 마을 사람들의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듣지 않게 되었네.” 정선이 말했습니다. “아! 땅에서 특산물이 나는 것은 그 땅의 재앙이다. 휘주는 땅이 메마른 고을일 뿐이다. 그런데 정규가 만든 먹과 용미 벼루 때문에 지금까지 겪은 괴로움이 참 많다. 좋은 정치를 비석에 새기도록 남겨 두고 맑은 바람만 소매에 가득 담아 가는 것, 이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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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주 고을을 다스리는 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이 고을은 해마다 나라에 벼루를 바쳤습니다. 전에 있던 태수들은 바칠 양의 수십 배를 거두어 힘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했습니다. 포증은 벼루 만드는 사람들에게 바칠 양만 겨우 채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를 마치고 돌아갈 때 벼루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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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문충공이 조카 통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제 편지에서 를 사 오겠다고 했다. 나는 이 물건이 모자라지 않다. 너는 벼슬을 하고 있으니 마땅히 청렴을 지켜야 한다. 어찌 네가 다스리는 곳의 물건을 살 수 있겠느냐? 나는 벼슬하는 동안 물 마시는 것 말고는 물건 하나도 산 적이 없다. 이것을 보고 조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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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개가 담주에서 버금 관리로 있을 때 일입니다. 한 큰 장사꾼이 진주조개를 몰래 숨겨 두었다가 관리에게 들켜 뒤짐을 당했습니다. 고을의 으뜸 관리인 태수부터 아래 관리들까지 그 값을 싸게 매기고는 모두 자기들이 사들였습니다. 뒷날 진주를 나누어 가진 일로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인종 임금이 곁의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당개는 틀림없이 사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을 다시 조사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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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계주 이홍절이 죽자, 그 집에서 진주를 팔았습니다. 태종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높은 신하인 재상이 청렴하다고 칭찬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벌써 진주를 팔았으니, 그를 추천한 사람에게 어찌 죄가 없겠느냐?” 그러자 위징이 나서서 사정을 풀어 말하며 감싸 주었습니다. 특산물은 이처럼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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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에서는 귀한 진주가 났습니다. 그런데 고을을 다스리는 들이 욕심 많고 더러워서, 사람들을 속여 억지로 진주를 캐게 했습니다. 그러자 진주가 점점 이웃 교지군 쪽으로 옮겨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장사꾼과 나그네가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살 길이 없었습니다. 맹상이 합포를 다스리는 태수가 되어 예전의 나쁜 일들을 고치고 없앴습니다. 그러자 한 해도 지나지 않아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장사꾼들도 다시 오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령 같은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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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후(유종원)는 〈영릉복유혈기〉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연산 땅에서는 가 납니다. 그런데 연산 사람들이 석종유가 다 떨어졌다고 알린 지 5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 바칠 때는 다른 고을에서 사서 바쳤습니다. 최공이 온 지 한 달이 넘자, 동굴을 맡은 사람이 와서 석종유가 다시 나온다고 알렸습니다. 예전 자사는 욕심 많고 사나웠습니다. 백성에게 일만 시키고 값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나머지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 자사는 명령이 분명하고 뜻이 깨끗합니다. 믿음과 따름이 아름답게 어울립니다. 그래서 참된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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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광동과 광서의 우두머리 장수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관리와 관청 일꾼인 아전들이 남쪽 를 사지 못하게 법을 세워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북쪽 서울로 돌아갈 때 남해의 물건은 하나도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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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승유가 남해를 다스리는 태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외국 배가 싣고 온 물건을 하나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사람은 촉나라에서 벼슬을 하고도 평생 촉나라 물건을 갖지 않았다. 나도 자손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하니, 감히 짐을 넘치게 꾸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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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주경칙은 부주를 다스리는 자사로 쫓겨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때 회남의 물건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탄 것은 말 한 마리뿐이었고, 아들들은 걸어서 뒤따라왔습니다. 동의가 촉주를 다스리는 태수가 되어 떠나려 할 때 일입니다. 아들들이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아버님의 곧은 마음은 저희가 잘 압니다. 그래서 살림살이는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나이가 많으십니다. 촉 땅에는 좋은 나무가 많으니, 돌아가신 뒤 쓰실 을 만들 나무는 마련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공은 “알았다, 알았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아들들이 물가에 마중 나왔습니다. 그리고 관 만들 나무를 어떻게 하셨는지 여쭈었습니다. 공이 말했습니다. “삼나무는 잣나무만 못하다고 들었다.” 아들들이 물었습니다. “아버님이 마련해 오신 것이 잣나무입니까?” 공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번에 실어 온 것 가운데 잣나무 씨앗이 있다. 이것을 심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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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얻으려고 일부러 꾸민 지나친 행동이 있습니다. 또 너무 엄하게 몰아붙이는 정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의 마음에 맞지 않습니다. 는 이런 것을 물리치고 따르지 않습니다. 양계종이 돼지 머리 때문에 아내를 쫓아낸 일이 있습니다(아래 ‘’ 조에 나옵니다). 허자가 몽둥이 나무로 자식을 따뜻하게 한 일도 있습니다(앞 편에 나옵니다). 이것은 너무 엄하게 몰아붙이는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공기가 비단을 불 속에 던진 일이 있습니다. 이견공(이면)이 코뿔소 뿔과 를 물속에 던진 일도 있습니다(마지막 편에 나옵니다). 이것은 일부러 꾸며 이름을 얻으려 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모두 군자가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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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말했습니다. “선비 벼슬아치가 덕을 해치는 것은 대개 이름을 날리려는 마음이 너무 급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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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함께 읽어요
북제 고환의 시대에 고적간의 아들 고적사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청렴하고 엄격해서 관청에서 주는 봉급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이 관청 부엌의 떡을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문은 아들을 감옥에 가두고 며칠 동안 목에 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이백 대를 때린 뒤 걸어서 서울로 돌려보냈습니다. 나쁜 짓 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찾아낼 때도 그랬습니다. 베 한 자나 곡식 한 말을 훔친 것이라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임금께 글을 올려 천 명을 남쪽 영남 땅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곳의 에 걸려 죽었습니다. 친척들이 소리 내어 울자, 사문은 우는 사람들을 잡아다 눈앞에서 매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우는 사람은 더 많아졌습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말했습니다. “사문의 사나움은 홀로 다니는 짐승보다 더하구나.” 그리고 죄를 물어 벼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 정선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덕 높은 어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윗관리가 욕심 많으면 백성에게 그래도 살길이 있다. 하지만 청렴하면서 하면 살길이 끊긴다.’ 예나 지금이나 청렴한 관리의 자손이 잘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바로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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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하지만 꼼꼼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 것을 덜어 내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 또한 칭찬하기에 모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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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산록》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가운데 청렴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청렴하기만 하고 꼼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재물을 덜어 내는 데만 힘쓰고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과 광대에게 나누어 주고, 어떤 사람은 절에 바칩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스스로 실제 일에 힘쓴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소를 사서 백성에게 나누어 주거나, 돈을 빌려주고 그것으로 을 메워 줍니다. 하지만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가 관청 문을 나서기만 하면 약속과 규칙은 곧 무너집니다. 소 살 돈은 모두 힘센 집안으로 들어가고, 관청 일꾼인 아전들은 그들과 이익을 나눕니다. 빚 독촉은 가난한 집에 억지로 떠맡겨지고, 백성은 이 때문에 집안이 망합니다. 새로 온 관리가 이 소식을 들으면 고기를 만난 매 같고, 땅을 박차는 호랑이 같습니다. 이미 써 버린 물건까지 뒤쫓아 거두어 끝없는 욕심을 채웁니다. 규칙과 약속은 모두 무너뜨리면서, 마치 나쁜 정치를 없애는 것처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도 지혜도 없는 짓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큰 재물이 있다면 밭을 사고 농장을 마련해서 부역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백성의 창고가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눈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노인을 모시고 어린아이를 아끼는 일, 혼인과 장례를 돕는 일입니다.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린 사람과 늙고 병든 사람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넉넉히 채울 뿐입니다. 내 자리도 언제까지일지 모르는데, 어찌 감히 뒷날의 계획까지 세울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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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물건을 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관청이 정해 둔 값이 너무 싸다면, 그때 시장에서 사고파는 값대로 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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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대초가 말했습니다. “벼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렴과 부지런함입니다. 털끝만큼이라도 모자라면 정치에 끼치는 해가 아주 큽니다. 또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렴이 제 몫의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여러 일에 부딪히고 형편에 쫓기다 보면 점점 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본래 가난하고 낮은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배고파 우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본래 부자이고 높은 사람은 입과 몸을 잘 먹이고 꾸며야 하는 요구가 있습니다. 칭찬받기를 좋아하면 음식과 탈것을 화려하게 차려 손님을 즐겁게 합니다. 힘 있는 사람과 사귀려 하면 뇌물을 두둑이 주어 친해집니다. 더 심한 사람은 아들을 장가보내고 딸을 시집보내느라 비단 주머니와 금 상자를 채우려 합니다. 이러니 청렴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겠습니까? 욕심 많고 부끄러움을 잊은 사람은 이런 것을 돌아볼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맑은 평판을 조금 두려워하는 사람도 이렇게 말하는 데 그칩니다. ‘나는 위로는 관청 창고에서 훔치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가지지 않으니 이만하면 됐다. 음식을 사들이는 것은 본래 관청이 정한 값이 있으니, 그대로 한들 무엇이 부끄러운가. 손님 대접하는 비용은 늘 하던 대로 관청 일꾼인 아전들이 보태는 것이니, 그대로 따른들 무엇이 부끄러운가.’ 그러니 과연 부끄러운 말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살펴보면, ‘본래 관청이 정한 값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 말하는 ‘’입니다. 관청이 정한 값은 대개 싸고 박합니다. 그중에 넉넉하게 정한 것이 있어도 관청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전이 어찌 견디겠습니까? 물건 값은 계절과 달마다 오르고 내립니다. 그런데 관청의 규칙은 한번 정하면 백 년 동안 고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장 값과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값이 박하면 아전이 괴롭습니다. 아전이 괴로우면 백성을 쥐어짭니다. 결국 해는 힘없는 백성에게 돌아가니, 아전이 무슨 손해를 보겠습니까? 아전이라는 사람들은 즐거우면 나오고 괴로우면 물러납니다.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즐길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은 즐거워도 머물고 괴로워도 머뭅니다. 몸이 땅에 붙어 있으니, 묶인 채 매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떠나지 못한다고 해서 괴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이른바 ‘이 되어 을 면제받는 마을’이 날마다 달마다 늘었습니다. 그래서 부역이 다른 마을에 몰려 괴로우니, 백성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잘못을 고치려 하면 아전들은 도망가겠다고 겁을 줍니다. 제가 그 까닭을 살펴보니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여러 고을이 에게 아첨하는 것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관청 규칙으로 물건 값을 억지로 정한 것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전이 손해를 보면 당연히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관청이 붙잡아 두려면 그들의 욕심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이익을 놓으려 하지 않고, 아래로는 세금을 더 걷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을 하나를 떼어 주어 계방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약삭빠르고 치사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을을 새로 맡은 은 누구나 계방을 없애려 합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나면 모두 말없이 마음이 꺾입니다. 그 뿌리가 자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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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에서 쓰는 모든 물건은 춘분과 추분에 시장 값에 맞게 값을 고쳐 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반년 동안 해 보고, 그대로 둘 것은 두고 고칠 것은 고칩니다. 늘 시장 값을 따라서 깎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면 자와 되를 똑같이 맞추고, 저울을 고르게 한다. 말과 되를 견주어 보고, 저울추와 를 바로잡는다.” 이것도 같은 뜻입니다. ○ 관청 일꾼인 아전과 하인들이 들여오는 물건을 사고팔 때 억울하다는 소리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역을 빼 주는 계방처럼 백성을 해치는 일들을 비로소 마음먹은 대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예전부터 잘못 내려오는 일은 마음먹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고치기 어려운 것이라면 나만이라도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평안도의 방번전(국경 지키는 일 대신 내던 돈), 산골 고을의 화속전(불을 놓아 일군 밭에 매기던 돈), 그 밖에 장터에 매기던 장세전과 무당에게 걷던 무녀포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잘못된 이지만 모두 에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빌려주던 곡식에 얽힌 평안도의 와환채(자세한 것은 ‘환상’ 조에 나옵니다)는 다릅니다. 장부에서 숨긴 논밭에 얽힌 남쪽 지방의 은채(자세한 것은 ‘전정’ 조에 나옵니다)도 다릅니다. 이것들은 오래 이어져 왔어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 새로 온 이 짐꾼과 말 값으로 받던 부쇄가는 절대로 다시 걷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 죄를 캐러 다니는 관리인 추관의 고마전은 절대로 거짓으로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고을에는 고마고라는 창고가 있습니다. 추관이 길을 나설 때마다 고마고에서 늘 수십 의 돈을 내줍니다. 그런데 한 달에 세 번 죄인을 해야 할 때, 서류로만 도의 으뜸 관청인 감영에 알리고 실제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마전은 그대로 받아 씁니다. ○ 왕실 땅인 궁결에서 남는 돈은 절대로 몰래 먹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왕실 집안(궁방)의 땅은 세금이 면제되어, 한 결마다 나라 살림을 맡은 호조가 걷는 돈은 7냥이 안 됩니다. 그런데 에 쌀값이 오르면 한 결마다 수십 냥을 걷고, 그 고을에서 나머지를 먹습니다. ○ 백성에게 걷어 모은 고을 창고인 민고에서 쓰는 자잘한 의 돈은 관례라고 해서 꼭 가져다 써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을을 다스리는 이 옳고 그름을 따져 보는 것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어기고 임금의 법을 어기는 일은 절대로 몸소 해서는 안 됩니다. 얽혀 있어 깨뜨리기 어려운 일은 고치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 방번전과 화속전은 다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망가지고 쓸쓸한 마을이라서 군인 수를 채우기 어렵고 걷을 곳이 없다면, 모두 덜어 주거나 없애 주어야 합니다.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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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김지석은 고종 임금 말년에 제주를 다스리는 제주부사가 되었습니다. 제주에는 이런 풍속이 있었습니다. 열다섯 살 넘은 남자는 해마다 콩 한 섬을 바쳤습니다. 관청 일꾼인 아전 수백 명은 저마다 해마다 말 한 마리를 바쳤습니다. 이것을 부사와 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다스린 관리들은 가난했던 사람도 모두 부자가 되었습니다. 원기와 이저 두 사람도 이 고을을 다스렸는데, 둘 다 뇌물죄로 쫓겨났습니다. 김지석은 고을에 온 날 바로 콩과 말을 바치는 일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청렴한 아전 10명을 뽑아 관청 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정치가 물처럼 맑아져서, 아전과 백성이 마음으로 따랐습니다. 그보다 앞서 경세봉이라는 사람도 제주를 다스렸는데, 그 역시 청렴하다고 칭찬받았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앞에는 경세봉이 있고, 뒤에는 김지석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고려의 권훤이 경주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경주에는 예전부터 창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백성에게서 비단을 세금으로 걷어 쌓아 두고, 이름을 ‘갑방’이라 했습니다. 이것으로 나라에 바칠 물건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남는 것이 아주 많아서, 모두 유수가 제 것으로 가졌습니다. 권훤은 갑방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걷은 것으로 3년 동안 바칠 물건을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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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황중이 승주의 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관청 창고를 돌아보다가 아주 단단히 잠긴 자물쇠를 보았습니다. 열어 보니 보물이 수천 상자나 나왔습니다. 모두 남당 임금 이씨의 궁궐 물건으로, 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가황중은 글을 올려 이것을 모두 나라에 바쳤습니다. 황제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관청 창고의 물건은 장부가 있어도 욕심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어기고 가져간다. 하물며 장부에도 없는 물건이야 오죽하겠느냐!” 그리고 돈 200만 편(옛날 돈을 세던 단위)을 내려 그의 깨끗함을 칭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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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이 옷감을 사들일 때는 반드시 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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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마다 장터가 있습니다. 물건 사는 일을 맡은 관청 일꾼인 아전과 하인들은 관청이 산다는 핑계로 옷감을 싼값에 억지로 삽니다. 또 고을을 다스리는 의 안채나 에서 몰래 사들이면서 슬그머니 값을 깎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전과 하인이 모자라는 값을 떠맡거나, 장사꾼이 앉아서 제값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원망을 사는 길인데, 관청에서는 듣지 못합니다. ○ 처음 부임했을 때 장터를 맡은 아전이나 세금 맡은 호방, 또는 다른 아전에게 이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옷감 장사꾼들에게 두루 알리게 합니다. “이제부터 관청이 사는 옷감에는 반드시 이 있다. 인첩에 찍는 도장은 손바닥만큼 크다. 이 인첩이 없으면 관청이 사는 것이 아니다. 받은 값은 너희가 인첩 아래에 직접 적어서 아전을 시켜 돌려보내라. 그래야 나중에 증거로 살펴볼 수 있다.” ○ 인첩은 이렇게 씁니다. 첫 줄에 ‘갑자년 2월 6일 관청 구매 표’라고 씁니다. 둘째 줄에 ‘8 무명 2’, 셋째 줄에 ‘9승 모시 1필’을 씁니다. 넷째 줄에 ‘10승 겉소매감 1필’, 다섯째 줄에 ‘우두머리 하인 득손’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도장을 찍습니다. ○ 물건을 사고 나면 장사꾼 이명담이 자기 이름을 직접 쓰고, 줄마다 값을 적어 돌려보내게 합니다. ○ 이렇게 하면 사들인 옷감을 궁중에서 바꿔치는 나쁜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사꾼들에게는 원망이 없을 것입니다. ○ 고을마다 풍속이 다릅니다. 아전들의 풍속이 순박해서 본래 속이는 일이 없는 곳이라면, 굳이 이 방법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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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쓰는 돈을 적은 장부는 하나하나 눈여겨 들여다보지 않아야 합니다. 끝에 서명하기를 흐르는 물처럼 빨리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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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여러 창고에서 올리는 지출 보고서는 자세히 살피고 몰래 조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엌 일을 맡은 아전이나 관청 심부름꾼인 현 사령이 올리는 보고서는 절대로 꼼꼼히 보지 않아야 합니다. 얼른 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수결은 사투리로 ‘수례’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쓴 것이 있더라도 절대로 깎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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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산록》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요즘에는 에게 장부를 맞추어 보게 하는 일이 흔합니다. 책객이 원망을 무릅쓰고 꼼꼼히 살피면 나쁜 말이 시끄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책객이 어찌 정치에 끼어드는가’라는 말이 반드시 의 평가에 나쁜 점으로 오릅니다. 반대로 책객이 사사로운 정에 끌려 나쁜 무리와 한패가 되면 비웃음이 잇따릅니다. 관청 일꾼인 아전과 이익을 나누는 잘못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아래 ‘병객’ 조에 나옵니다). 또 장부를 , 곧 한글로 바꾸어 적어 안채에 들여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안채의 도장을 받아 서로 맞추어 봅니다. 이것은 안방을 엄하게 하지 못하고 일의 체면도 어그러지는 일입니다. 모두 해서는 안 됩니다.” 안채에 대 주는 물건은 모두 양을 정해 두고, 모두 에 한꺼번에 들이게 해야 합니다(아래 ‘절용’ 조에 나옵니다). 그러면 날마다 대고 쓰는 물건은 한두 가지에 그치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더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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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을 다스리는 의 생일에 관 일꾼인 아전과 , 여러 청에서 푸짐한 상을 차려 올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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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안 여러 청에서 올리는 음식은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온 것입니다. 에서 돈을 걷기도 하고, 보율(관청에 딸려 돈을 내던 사람들)에게서 돈을 걷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마구 거두어들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부의 물고기를 빼앗고, 마을의 개를 때려잡습니다. 밀가루와 기름은 절에서 빼앗고, 사발과 접시는 그릇 굽는 집에서 빼앗습니다. 이것들은 원망을 긁어모은 물건입니다. 그러니 어찌 받겠습니까? 한 벌이나 고운 베 몇 필을 바치며 오래 살기를 빌어 주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받아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에 바치는 것은 더더욱 받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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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대초가 말했습니다. “생일에 오래 살기를 빌며 바치는 것은 모두 없애야 한다. 내가 바라지 않았는데도 관청 일꾼인 아전들이 고칠 줄 모른다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에 부끄러운 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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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거나 내놓은 것이 있어도 소리 내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는 얼굴을 하지 말고,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에 있던 관리의 잘못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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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하고 깐깐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런 일이 있습니다. 잘못된 로 들어온 재물을 버려 공정한 도리를 따르기도 합니다. 자기 봉급을 덜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 일은 착합니다. 하지만 막 그것을 내놓을 때, 꼭 기세를 부리며 큰소리칩니다. “선비 벼슬아치가 어찌 이런 물건을 쓰겠느냐!” 관청 일꾼인 아전이 관례를 들어 설명하면, 꼭 꾸짖고 몽둥이로 때려서 자기의 청렴을 드러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봉급에서 남은 것으로 내가 어찌 돌아가서 논밭을 사겠느냐!” 이렇게 큰소리로 자랑하며 을 가득 냅니다. 백성을 만나도 손님을 만나도 늘 자랑하고 뽐냅니다. 마음속으로는 돈 수백 을 아주 큰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생각 깊은 사람이 곁에서 보면 어찌 속으로 웃지 않겠습니까? 재물을 내놓고 봉급을 덜어 낼 때는 지나가는 말 몇 마디로 담당 아전에게 일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꺼내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은 우선 그렇게 해 둔 것뿐이오. 뒤에는 어찌 될지 모르겠소.” 그러고는 다른 이야기를 하여 다시는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앞의 관리가 관례를 따른 것은 본래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재물을 내놓는 것은 어쩌면 칭찬을 받고 싶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작은 은혜를 내세워 남이 늘 하던 일을 흉보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꼭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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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연이 말했습니다. “벼슬살이에서 첫째는 청렴이다. 하지만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 이렇게 된다. 함께 일하는 사람 가운데 조심성 없는 사람이 많아서 꼭 나를 헐뜯는다. 윗사람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 그러면 도리어 화를 부를 뿐이다. 그저 말없이 실천해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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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말했습니다. “벼슬자리에서 청렴한 것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 청렴하기는 어렵지 않다. 청렴을 드러내지 않기가 어렵다. 자기가 청렴하다고 믿고 남을 몰아붙이거나 깔보지 않기는 더 어렵다.” 또 말했습니다. “청렴은 벼슬살이의 기본이다. 그러니 청렴을 뽐내며 깨끗하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조심성은 벼슬살이의 꼼꼼한 마음가짐이다. 그러니 큰일만 조심하고 작은 일을 히 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함은 정치를 실제로 해 나가는 바탕이다. 그러니 처음만 부지런하고 끝에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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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의 아버지 호질이 형주로 있을 때 일입니다. 호위가 서울에서 아버지를 뵈러 왔다가 돌아가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호질은 비단 한 필을 주어 길에서 쓰게 했습니다. 뒷날 진나라 무제가 호위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와 그대 아버지 가운데 누가 더 청렴한가?” 호위가 대답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청렴하시면서 남이 알까 두려워하셨습니다. 저는 청렴하면서 남이 모를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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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악 이안눌 선생이 로 뽑혔을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고을을 다스리고 로 일하면서 어찌 흠이 없었겠는가. 다만 아내가 살림을 잘 꾸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 옷과 음식, 사는 집과 쓰는 물건이 남 보기에 좋지 않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나를 청백하다고 여긴 것이다. 나는 이것이 몹시 부끄럽다.” 옛 어른들은 이처럼 실제를 따르고 이름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재륜의 《공사문견록》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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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한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은혜가 적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는 엄하게 하고, 남의 잘못은 가볍게 따지면 됩니다. 몰래 하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청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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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일꾼인 아전과 하인들은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만 있을 뿐 하늘의 이치를 모릅니다. 나도 겨우 애쓰고 있는 형편인데 어찌 남을 나무라겠습니까. 나 자신은 으로 다잡아야 합니다. 남을 나무랄 때는 보통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너그럽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원망을 사지 않는 길입니다. 법에 없는 명목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은 법으로 엄하게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를 그대로 이어받아 늘 받는 봉급처럼 여기는 것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 부표채처럼 관례로 더 받던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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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선이 고을을 다스릴 때 일입니다. 고을 관청의 낮은 일꾼인 아전이 관청의 매를 잃어버리고는 다른 매를 사서 바쳤습니다. 조극선이 말했습니다. “매가 제 스스로 날아간 것인데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는 매를 받지 않고 돌려주었으며, 죄도 묻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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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산록》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같은 관청 일꾼, 곧 아전들을 보면 늘 이렇다. 가난한 친구나 친척을 만나도 자기 봉급에서 남은 것을 나누어 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에게 따로 일거리 하나를 찾게 하고,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이것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내 친척을 돕는 짓이다. 아내 주머니에는 한 푼도 들어가지 않고 칭찬하는 소리가 일어난다 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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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하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집니다. 좋은 이름이 날마다 널리 알려집니다. 이것 또한 사람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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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윤선좌는 충숙왕 때 한양윤이 되었습니다. 얼마 뒤 왕과 공주가 용산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왕이 곁의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윤선좌는 청렴하고 검소해서 백성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너희는 조심해서 소란을 피우지 마라.” 뒷날 왕이 손수 고을을 다스릴 의 이름을 적어 임명하고 있었습니다. 계림윤 자리에 이르자 붓을 멈추고 생각했습니다. “에 신하가 가득하지만 윤선좌만 한 사람이 없구나.” 그러고는 곧바로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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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전록생이 경주이 되어 청렴하고 깨끗하게 다스렸습니다. 이제현은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전랑이 우리 의 버금 관리가 되니, 마을 어르신들이 지금도 그의 맑은 덕을 그리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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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고을을 다스리던 완선군 이의전의 이야기입니다. 창석 이준 선생이 그 고을을 지나다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맑은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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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은 가 송교입니다. 그가 서천 고을을 다스리는 군수가 되었을 때, 이안눌이 그의 근무 성적을 매기며 이렇게 썼습니다. “맑기는 옥으로 만든 병 같고, 은혜롭기는 봄바람 같다.” ○ 채번옹(채지홍)은 이천 고을을 다스리는 부사가 되어 맑고 간결한 정치를 힘썼습니다. 관찰사는 그의 근무 성적을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좋은 정치를 했기에 이천의 물까지 맑아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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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령은 수원가 되어 청렴하고 따뜻하게 다스렸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편지를 보내 축하했습니다. “큰물이 산을 둘러싸서 바로 곁에서도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그대가 어질다는 소문만은 귀에 시끄럽게 들려옵니다.” ○ 이천에는 옛 이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규령 사또의, 오랜 세월 으뜸가는 맑은 덕과 좋은 정치를 기리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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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공 6조: 선화(교화를 선포함), 수법(법을 지킴), 예제(예의로 교제

백성 사랑하기() 여섯 은 이렇습니다. 노인 모시기(양로), 어린이 돌보기(자유), 가난한 사람 돕기(진궁), 사람이 죽은 집 위로하기(애상), 아픈 사람 돌보기(관질), 재난 당한 사람 구하기(구재)입니다. ○ 백성 사랑하기 여섯 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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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사랑하는 여섯 가지 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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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을 다스리는 이 할 일이 어찌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위에서는 칠사로 명령을 내리고, 아래에서는 칠사만 받들어 따릅니다. 마치 칠사 말고는 더 힘쓸 일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남을 아끼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막막해합니다. 어찌 한숨이 나지 않겠습니까? 에서 백성을 맡은 벼슬인 대사도가 하는 일 가운데 ‘’은 참으로 백성을 돌보는 이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이제 그 뜻을 간추려서 ‘애민 여섯 조목’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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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 제1조 — 노인을 받들어 모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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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모시는 이 사라지자 백성들이 에 힘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백성을 돌보는 이라면 이 예식을 꼭 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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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예법에서는 벼슬한 가운데 나이 많은 노인을 ‘국로’라 했습니다. 보통 백성 가운데 나이 많은 노인은 ‘서로’라 했습니다. 순임금(유우씨)은 서로를 하상이라는 학교에서 모셨습니다. 하나라 임금(하후씨)은 서로를 좌학에서 모셨습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서로를 교상에서 모셨습니다. 이것은 《예기》의 〈왕제〉 편에 나옵니다. 오늘날 은 서로만 모시면 됩니다. 《예기》에는 “봄에는 들을 대접하고, 가을에는 노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라고 했습니다. 〈월령〉 편에는 “봄에는 어린아이를 기르고, 가을에는 기운 없는 노인을 모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을걷이가 끝난 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이 예식을 치러야 합니다. 날에 치러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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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효도하면서 웃어른께 하지 못한 사람은 있다. 하지만 공손하면서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훌륭한 옛 임금의 제도는 공손함이 마을에도, 길에도, 군대에도 두루 퍼지게 했다. 그 가르침은 나라에서 노인을 모시는 일에 뿌리를 두었다. 순임금 때부터 이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돈이 들까 걱정한다. 하지만 예법에는 일흔, 여든, 아흔, 백 살마다 차리는 그릇 수가 정해져 있다. 그러니 더 늘릴 필요가 없다. 사람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면 가장 나이 많은 분만 모셔도 된다. 아니면 마을을 돌아가며 모셔도 된다. 봄에는 동쪽 마을, 여름에는 남쪽 마을에서 모시는 식으로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술을 권하고 답하는 예법처럼 순서를 대강 정하자. 그리고 아랫사람의 사정이 윗사람에게 닿게 한다면, 어찌 작은 도움이겠는가.” 사마공(사마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임은 자주 하되 예는 정성스럽게 하고, 물건은 적게 하되 정은 두텁게 해야 한다. 그러니 한도를 정해 두고 때가 지나면 한 번씩 모이는 것이 좋다.” ○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을 모시는 것은 훌륭한 옛 임금이 남긴 제도이다. 한나라 명제 뒤로 위나라 고귀향공이 이 예식을 치렀다. 그 뒤에 북위 효문제와 북주 무제가 이 예식을 치렀다. 그 뒤로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임금의 자리가 너무 높아져서 아랫사람의 사정이 닿지 못했다. 들까지도 모두 스스로를 함부로 높였다. 그래서 이 예식이 마침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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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모자라는데 크게 치르려 하면 널리 베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든 살 넘은 분을 골라 모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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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살 넘은 남자를 골라 잔치에 모십니다. 여든 살 넘은 분의 상에는 그릇() 네 개를 씁니다. 떡과 국 말고 접시가 네 개라는 뜻입니다. 아흔 살 넘은 분의 상에는 그릇(두) 여섯 개를 씁니다. 이것은 의 법을 오늘에 맞게 헤아린 것입니다. ○ 몸이 약하거나 아파서 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음식을 집으로 보내 드립니다. ○ 백 살 된 분이 있으면, 그날 은 그릇(두) 여덟 개를 차린 음식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의 우두머리를 보내 그 집에 직접 바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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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 동월이 지은 《조선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라에 여든 살 노인이 있으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잔치를 베풀어 은혜를 널리 베푼다.” 동월은 스스로 이런 풀이도 달았습니다. “해마다 늦가을이면 왕은 여든 살 노인들을 궁전에서 대접하고, 왕비는 여든 살 부인들을 궁에서 대접한다.” ○ 조선 초기에는 해마다 이것이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월의 《조선부》에 이렇게 적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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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모시는 예식에는 꼭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일(걸언), 백성의 어려움을 묻는 일(순막), 아픈 데가 없는지 묻는 일(문질)입니다. 그래야 이 예식에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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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횡거가 운암현의 이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달마다 초하루에 술과 음식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고을의 나이 많은 노인들을 불러 관청 마당에 모이게 했습니다. 직접 술을 권하고 답하며, 사람들에게 노인을 모시고 어른을 섬기는 를 알게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백성들의 괴로움과 자녀를 가르치는 법을 물었습니다. ○ 살펴보면, 횡거가 한 일은 옛날에 노인을 모시며 가르침을 청하던(걸언) 뜻과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장여헌(장현광)이 보은이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마을 어른들과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에 모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백성의 어려움과 고을의 잘못을 말하게 하여 채우고 바로잡았습니다. 효도와 공경을 두텁게 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북돋웠습니다. 덕 있는 행동을 높이고, 나쁜 풍속을 물리쳤습니다. ○ 살펴보면, 이것도 횡거의 방법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예법을 따르되 꾸밈과 절차는 간단하게 줄여서, 고을 학교인 에서 치릅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대학》에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면 백성들 사이에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에서 노인을 모시는 예식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이 이 예식을 치르려면 이 또한 학궁에서 치러야 합니다. 옛날에는 향음례에도 금과 슬이라는 악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말하는 은 군대 음악이라 학궁에서 쓸 수 없습니다. 반드시 금, 슬, 종, 북이 있어야 치를 수 있습니다. ○ 또 좋은 예식이든 슬픈 예식이든 모든 예식에는 손님 한 명과 주인 한 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 노인 가운데 가장 높은 분을 손님으로 세워야 예식을 치를 수 있습니다. 절하거나 할 때는 손님 한 사람만 맞절하고 맞읍합니다. 다른 손님들은 함께 움직이지 않습니다. 먼저 이 예법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노인을 모시는 예식은 이렇게 치릅니다. 하루 전에 가 향교에 천막을 칩니다. 마당 바닥에 짚자리와 거적을 두껍게 깝니다. ○ 다음 날 새벽에 자리를 폅니다. 흰 돗자리에 푸른 천을 두른 것을 씁니다. 고을 원님인 목사의 자리는 서쪽을 보게 놓습니다. 노인들의 자리는 북쪽에 늘어놓아 남쪽을 보게 하고, 동쪽을 윗자리로 합니다. 목사는 동쪽에 있습니다. 남쪽에 늘어놓아 북쪽을 보게 하고 동쪽을 윗자리로 하는 것은 신분이 중간이거나 낮은 사람들(중층·하층)의 자리입니다. ○ 에 목사가 관복과 관을 갖추고 나와 자리로 갑니다. ○ 향교 동쪽 건물(동재)의 가 높은 노인들을 이끌고 문밖 자리로 갑니다. 문 동쪽에서 서쪽을 보고,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나이 순서대로 섭니다. ○ 향교 서쪽 건물(서재)의 장의가 신분이 중간이거나 낮은 노인들을 이끌고 문밖 자리로 갑니다. 문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나이 순서대로 섭니다. ○ 그리고 동쪽 줄의 첫째 분을 손님(빈)으로 세웁니다. ○ 예리가 나가서 손님을 청합니다. “고을 원님인 현령께서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셨습니다. 음악으로 손님을 대접하고자 하십니다.” ○ 손님이 대답합니다. “현령께서 명이 있으시나 저는 덕이 없으니 감히 사양합니다.” ○ 예리가 돌아가 알리고 다시 나와 청합니다. “옛 예법을 따르고자 하오니 감히 굳이 청합니다.” ○ 손님은 “굳이 사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 예리가 세 번째로 청합니다. “감히 굳이 청합니다.” ○ 손님이 말합니다. “제가 사양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공경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 음악을 연주합니다. ○ 예리가 목사를 이끌고 나와 문 안 동쪽에 세웁니다. ○ 손님이 문지방 서쪽으로 들어와 동쪽을 보고 섭니다. ○ 목사가 서쪽을 보고 읍하면 손님이 답례로 읍합니다. ○ 목사가 들어가 자리로 가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서쪽을 보고 섭니다. ○ 장의가 손님을 이끌어 동쪽 줄로 들어가고, 여러 노인이 뒤따릅니다. ○ 손님은 들어가 북쪽 줄 자리로 갑니다. 자리에 오르지 않고 남쪽을 보고 섭니다. ○ 장의가 서쪽 줄 노인들을 이끌어 남쪽 줄 자리로 들어갑니다. 자리에 오르지 않고 북쪽을 보고 섭니다. ○ 목사가 몸을 굽혀 절하면 손님이 맞절합니다. 동쪽과 서쪽 줄의 노인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습니다. ○ 목사가 자리에 앉으면 손님과 노인들도 저마다 몸을 돌려 앉습니다. ○ 음식은 노인들께 먼저 올립니다. ○ 음식을 다 올리면 목사가 일어나 상을 둘러봅니다. 북쪽 줄을 먼저 보고 남쪽 줄을 봅니다. 둘 다 동쪽을 먼저 보고 서쪽을 나중에 봅니다. ○ 목사가 자리로 돌아오면 목사에게 음식을 올립니다. ○ 음악을 멈춥니다. ○ 술을 맡은 사준이 술을 따라 목사에게 올립니다. ○ 목사는 잔을 받아 잔을 나르는 봉작에게 줍니다. 사준과 봉작은 선비(유생)가 맡고, 서쪽 줄은 향교 학생(교생)이 맡습니다. ○ 봉작이 잔을 받아 손님에게 올리고, 차례로 여러 노인에게 올립니다. ○ 노인들은 잔을 받아 저마다 자기 작은 밥상(소반) 위에 놓습니다. ○ 봉작이 목사에게 잔을 올립니다. ○ 음악을 연주합니다. ○ 목사가 잔을 받아 마시면 여러 노인도 모두 마십니다. ○ 잔치가 끝나면 음악을 멈춥니다. ○ 목사가 일어나 잔치 상을 살펴봅니다. 북쪽 줄을 먼저 보고 남쪽 줄을 봅니다. ○ 그리고 상을 치웁니다. 노인들 상을 먼저 치우고 목사 상을 나중에 치웁니다. ○ 이제 가르침의 말씀을 청합니다. ○ 예리가 붓과 종이를 손님께 올립니다. ○ 손님은 좋은 가르침을 종이에 써서 다스림에 힘쓰도록 북돋웁니다. ○ 예리가 처음처럼 차례로 여러 노인의 말씀을 받습니다. ○ 다 받으면 그 종이를 목사에게 올립니다. ○ 목사가 일어서면 여러 노인도 모두 일어납니다. ○ 목사가 절하면 손님이 맞절하고, 다른 노인들은 맞절하지 않습니다. ○ 진행을 맡은 찬자가 예식이 끝났다고 알립니다. ○ 음악을 연주합니다. ○ 목사가 일어서면 여러 노인도 모두 섭니다. ○ 손님이 나가 문 안 서쪽에 이르러 동쪽을 보고 섭니다. ○ 목사가 나가 문 안 동쪽에 이르러 서쪽을 보고 섭니다. ○ 목사가 읍하면 손님이 답례로 읍합니다. ○ 노인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음악 속에 밖으로 나갑니다. ○ 꼭 마당에서 잔치를 여는 까닭이 있습니다. 목사는 대청에 앉고 노인들은 마당에서 대접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높은 노인은 대청에서, 낮은 노인은 마당에서 대접하는 것도 예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 마당에서 해야 괜찮습니다. ○ 대접이 끝나면 기름종이를 한 장씩 노인들에게 드립니다. 자녀들이 그것을 품고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 노인 한 분마다 자녀 두 사람이 부축하며 뒤따르게 해 줍니다. 자녀가 없으면 친척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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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어진 분들이 이 방법을 다듬어 실천해서 이미 좋은 가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장전이 금당현을 다스릴 때 일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노인을 모시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가끔 마을 어른들을 불러 자녀들을 잘 살피게 했습니다. 백성이 작은 착한 일이라도 하면 모두 장부에 적어 두었습니다. 자기 봉급으로 술과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달마다 초하루에 노인들을 불러 대접하며 위로했습니다. 그 자손들을 곁에 서서 모시게 하고, 효도와 공경을 권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그의 덕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다툼과 재판이 날마다 줄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일두 정여창 선생이 안음 으로 있을 때 일입니다. 그는 나랏일을 보고 남는 시간에 고을의 똑똑한 젊은이들을 뽑았습니다. 공부하는 집을 지어 머물게 하고 직접 가르치고 이끌었습니다. 날마다 읽고 풀이한 것을 점검했습니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도 찾아왔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노인을 모시는 예식을 치렀습니다. 안과 밖에 대청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안에서는 부인이 대접하게 하고, 밖에서는 선생이 관복을 갖추고 대접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두 취하고 배불러서,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습니다. 정치는 맑고 백성은 기뻐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서로 일러, 속이는 일로 선생을 저버리지 말자고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박환이 단양가 되었습니다. 단양은 산골 외진 곳이라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를 할 때도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이 많은 마을 어른들을 모셔다가 술과 음식을 넉넉히 대접하며 즐겁게 해 드렸습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팔송 윤황 공이 영광가 되었습니다. 영광은 본래 일이 많고 힘들기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공은 처음 와서 아침 일찍 관청에 나가고 밤늦게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한 해가 지난 뒤에는 고을이 조용하고 일이 없어졌습니다. 좋은 날과 명절이면 노인들을 크게 모아 노인을 모시는 예식을 치렀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모시고 잔치에 나왔습니다. 큰형도 능성에서 와서 함께 잔을 올려 오래 사시기를 빌었습니다. 위아래 사람이 모두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일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조극선이 순창가 되었을 때, 을 바로 세우고 노인을 모시는 예식을 치렀습니다. 효도와 가 깊거나 행실이 바른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관청에서 대접하고 술을 권하며 칭찬하고 북돋웠습니다. 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집으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은 그 자손을 도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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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항이 연풍이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노인들을 관청 마당에 두루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주인으로서 예를 갖추어 대접했습니다. 혼인할 때를 놓쳐 시집가지 못한 여자에게는 비용을 보태 주었습니다. 젊은이 가운데 조금 뛰어난 사람에게는 양식을 주어 공부를 북돋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고을이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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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맞추어 노인을 높이 대접하는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도 노인을 받들 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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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록》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든 살 넘게 오래 사신 남자 21명과 여자 15명을 골랐다. 그리고 털모자 36개를 샀는데, 남자 것은 자주색, 여자 것은 검은색이었다. 입동 날에 관청에서 이것을 나누어 드렸다. 비용은 겨우 1관과 돈 10량에 지나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기뻐하며 마음으로 따랐다. ○ 계피와 생강을 넣은 엿을 방법대로 만들어 36을 마련했다. 이것을 기름종이에 싸서 동짓날에 관청에서 나누어 드렸다. 비용은 1관도 되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기뻐하며 마음으로 따랐다. 만드는 법은 이렇다. 먼저 검은 엿 30여 근을 만든다. 그리고 약재인 계피, 건강(말린 생강), 진피, 반하, 괄루인, 천초, 오매, 칠엽(겉껍질을 써도 된다)을 각각 2량씩 넣는다. 후추와 약재 남성은 각각 1량씩 넣는다. 고루 버무려 식기를 기다린다. 그런 다음 볶은 콩가루를 겉에 묻힌다. 이 엿은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멈추게 한다. 배 속의 벌레를 가라앉히고 기운을 내려 준다. 그래서 노인들이 겨울에 먹기에 아주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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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을 이틀 앞두고, 노인들께 먹을거리를 보내 드려 안부를 여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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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살 넘은 남자를 골라 저마다 쌀 1말과 고기 2근을 보냅니다. 예물 목록을 갖추어 안부를 여쭙니다. 여자에게는 조금 줄여서 보내도 괜찮습니다. 아흔 살 넘은 분께는 귀한 음식 두 그릇을 더 드립니다. 고치 모양 떡, 꿀떡, 말린 꿩고기 같은 것입니다. ○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큰 고을이라도 여든 살 넘은 분은 수십 명뿐이고, 아흔 살 넘은 분은 몇 명뿐입니다. 쌀은 두 섬(30말), 고기는 60근이면 됩니다. 이것이 어찌 내놓기 아까운 재물이겠습니까? 기생을 끼고 광대를 불러 하룻밤 즐기느라 돈 만 을 가볍게 써 버리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선비들은 흉보고 백성들은 저주합니다. 그 지나친 놀음을 미워하는 마음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물을 잃고 원망을 사는 일입니다. 가 이 일을 들어도 잘 다스린 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손이 이 일을 보아도 에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쓸데없이 낭비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비용의 절반만 덜어서 노인을 모시는 예식을 치르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옛날 영조 임금 때는 들이 노인을 모시는 일을 해마다 하는 행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40여 년 동안은 이런 일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다시 되살려 실천해야 합니다.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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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재 심대부가 성산이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외롭고 약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나이 많은 분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명절과 새해 때마다 옛날 방식 그대로 쌀과 고기를 보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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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 제2조 — 어린이를 사랑하고 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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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사랑하여 돌보는 일은 옛 훌륭한 임금들의 큰 정치였습니다. 여러 가 이 일을 다듬어 좋은 법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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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의 대사도 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보식의 법으로 모든 백성을 기른다. 첫째는 어린이를 사랑하여 돌보는 것(자유)이고, 둘째는 노인을 모시는 것(양로)이다.” 이 대목에 은 이런 풀이를 달았습니다. “아이를 셋 낳으면 를 주고, 둘 낳으면 먹을 것을 준다.” 《주례》는 이어서 “셋째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 제 생각에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아를 돌보는 일입니다. 정현이 풀이에서 갑자기 월나라 의 법을 끌어와 ‘자유’라고 한 것은 뜻이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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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총주서》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을 세워 고아 돌보는 일을 맡기고, 우두머리를 세워 어린아이를 잘 기르게 한다.” ○ 《관자》에는 “나라의 마다 고아를 맡는 벼슬이 있다. 고아 한 명을 기르는 사람은 자식 한 명의 세금을 해 준다.”라고 했습니다. ○ 《한시외전》에는 “백성 가운데 어른을 공경하고 고아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으면 임금에게 알린다. 그러면 그 사람은 꾸민 수레와 말 두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탈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 제 생각에 이것들은 모두 어린이를 사랑하는 정치입니다. 하늘과 땅의 따뜻한 기운을 해치고 사람 마음을 몹시 슬프고 아프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려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보다 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사랑하는 정치를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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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학자가 쓴 〈사고론〉에 이런 물음이 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을 만나 자식을 파는 사람이 있다.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는 사람도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죽고 친척도 없어서 꼭 죽게 된 아이도 있다. 5월에 태어난 아이는 꺼림칙하다고 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자식 없는 집에서 이런 아이를 거두어 길러 어른이 되도록 가르쳤다고 하자. 그런데 누가 ‘너는 이 집 자식이 아니다. 예법에 성이 다른 사람은 대를 잇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가 본래 성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닌가?” ○ 송나라의 유울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가지 고아의 부모가 자식을 기르지 못한 것이 어찌 자식이 살기를 바라지 않아서였겠는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남의 집 대를 잇더라도 자식이 살기를 바라지, 어찌 자식이 그 죽게 두려 했겠는가. 그렇다면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대를 잇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미 남의 대를 이었다면 어찌 그 집 성을 따르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는 에 나옵니다. ○ 제 생각에 네 가지 고아를 거두어 대를 잇게 하려는 사람은 틀림없이 평범한 백성이나 일 것입니다. 그것이 예법에 맞는지는 천천히 따져도 늦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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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에서는 군과 현마다 을 세웠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버려져 길러지지 못하면 자유국으로 안고 오게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해와 달과 날을 적어 두었습니다. 자유국에서는 유모를 두어 아이를 길렀는데, 보통 집에서 기르는 것과 다름없이 보살폈습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유국에 와서 아이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이 든 해에도 길에 버려지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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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생사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려고 올린 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홍수 뒤에 가뭄이 잇따르니, 굶주린 사람과 굶어 죽은 시체가 곳곳에 보입니다. 굶주림 때문에 돌림병이 생기니, 부부와 부모 자식이 모두 살 곳을 잃고 흩어졌습니다. 가장 참혹한 것은 길 위의 아기들입니다. 숨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아직 울고 있습니다. 길가의 착한 사람들은 마음 아파하며 한숨만 쉴 뿐입니다. 심지어 죽은 엄마가 살아 있는 아기를 안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찌 이야기이겠습니까. 굶주린 아버지가 굶주린 아이를 안고 있기도 합니다. 어찌 와 같겠습니까.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니 참으로 하소연할 데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니 참으로 가엾은 백성입니다. 하늘은 만물을 고르게 돌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진 사람이 어찌 그 죽어 가는 모습을 서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원주항의 민가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는 ‘수기창’을 특별히 열었습니다. 사무소에서 경험 많은 할머니들을 알맞게 모으고, 여러 아이를 널리 모았습니다. 양쪽에 돗자리를 깔고, 가마솥 몇 개에 죽을 끓입니다. 병든 아이에게는 처방과 약을 주고, 치료는 좋은 의사에게 맡겼습니다. 어린아이는 꼭 울며 보채기 마련이니, 달래고 기르는 일은 여러 할머니에게 맡겼습니다. 요즘 도적들이 빼앗아 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고을을 지키는 이들을 위해 재물을 남겨 두었겠습니까. 예로부터 착한 일을 쌓아 복을 받은 일을 살펴보면, 덕 있는 집안에 가 넘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랍니다. 도랑에 쓰러진 여윈 아이들을 가엾게 여겨 그 아픔을 살펴 주십시오. 부엌의 밥상을 조금 덜어 이 떠도는 아이들에게 베풀어 주신다면, 자식을 많이 두는 좋은 일이 생겨 복이 메뚜기 떼처럼 불어날 것입니다. 큰 덕이 대대로 번성하여, 집안이 반드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드나들 만큼 높아질 것입니다.” ○ 살펴보면, 이것은 군이나 현의 명령이 아닙니다. 마을 모임의 덕 있는 사람이 스스로 자유국을 세우고 이렇게 재물을 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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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가난에 쪼들려 아이를 낳아도 기르지 못합니다. 이들을 이끌고 도와 아이를 기르게 해서, 우리 아들딸들을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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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망쳐 먹을 것이 없는 해에는 길에 버려진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이 백성의 어버이로서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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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방삼이 한양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 고을에 임당이라는 사람이 숨어 살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방삼이 먼저 그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임당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추 한 뿌리와 물 한 사발을 병풍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이를 안고 문밖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방삼은 그 숨은 뜻을 생각해 보고 말했습니다. “물은 내가 맑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추는 내가 힘센 집안을 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이를 안고 문 앞에 있는 것은 내가 문을 열어 외로운 아이들을 돌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그대로 실천했고, 한양은 아주 잘 다스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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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가 건주의 가 되었을 때, 마침 강서 지에 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이 길가에 아이를 버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유이는 큰길에 방을 붙여, 사람들에게 아이를 거두어 기르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의 쌀 2씩을 주었습니다. 또 하루에 한 번씩 아이를 안고 관청에 와서 보이게 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쌀 2승을 받는 이익 때문에 모두 아이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그래서 온 고을에서 아이들이 일찍 죽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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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석림(엽몽득)이 허창에 있을 때 큰 홍수가 났습니다. 그는 10여 만 명을 도와 모두 살려 냈습니다. 하지만 버려진 아기들만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곁의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자식 없는 사람들은 왜 이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지 않는가?”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기르고 싶어 합니다. 다만 아이가 다 자란 뒤에 친부모가 와서 알아보고 데려갈까 걱정할 뿐입니다.” 그래서 공이 법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재해 때문에 버려진 아기는 부모가 다시 데려갈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공은 이 법을 만든 사람도 어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부모가 이미 아이를 버렸으니 부모의 은혜는 이미 끊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거두지 않는다면 누가 살리겠습니까. 공은 곧 빈칸이 있는 수천 장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그 법 조문을 자세히 싣고, 고을 안팎에 찍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를 많이 거두어 기르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에 남은 곡식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형편을 헤아려 비용을 보태 주었습니다. 일이 가라앉은 뒤 장부에 따라 증서를 내주니 모두 3,800명이었습니다. 모두 도랑과 구덩이에서 건져 내어 포대기에 감싸 안게 한 아이들이었습니다. ○ 송나라 효종 순희 8년에 신하들이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굶주린 때에 버려진 아기를 남이 거두어 기르면, 법으로 친부모가 다시 데려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기르는 집이 관청에 알려 에 올리고, 친자식이나 손자와 같은 법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지난날 엽몽득이 영창을 다스릴 때 큰 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름 칸이 빈 증서를 만들어 위의 법 조문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나무판에 새겨 마을 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두어 기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증서를 주니, 살아난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고을에 명하여 나무판에 새겨서 백성들이 두루 알도록 타이르게 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문헌통고》에 나옵니다. ○ 살펴보면, 이것이 바로 데려다 자식으로 삼아 기르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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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이종 순우 9년에 임안에 자유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길에 버려진 갓난아기들을 거두어 길렀습니다. ○ 허호가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사랑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다. 가장 큰 아픔은 서로 헤어지고 버리는 것이다. 가장 큰 사랑을 버리고 가장 큰 아픔을 겪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형편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어진 사람이 가엾게 여겨야 할 일이다. 이종은 자유국을 세워 아이들을 거두어 길렀다. 그런데 그 아기들의 부모가 왜 가장 큰 사랑을 버리고 가장 큰 아픔을 겪게 되었는지는 어찌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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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산(진덕수)이 담주의 가 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는 따로 를 세우고, 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버려진 고아들을 기르고 돌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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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가 정주의 가 되어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니, 정치와 가르침이 널리 퍼졌습니다. 촉 땅의 한 선비가 정주를 지나다가 백 금이 든 돈 자루를 잃어버렸습니다. 선비가 와서 이 일을 말하자 왕조가 말했습니다. “그 가 보시오. 지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가 보니 정말 한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선비가 물었습니다. “왜 가져가지 않았소?” 지키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이를 버렸을 때 내가 지켰소. 그때 께서 차마 보지 못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타이르셨소. 그런 내가 어찌 돈을 가지고 달아나서, 사또로 하여금 우리 사또의 고을 안에서 떠돌게 하겠소?” ○ 외로운 아이들을 돌보는 정치가 사람을 이렇게 감동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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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에서도 법을 세워,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자식이나 로 삼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 규칙은 아주 자세하고 꼼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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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함께 읽어요
《국조보감》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중종 6년에 서울과 지방에 명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게 했습니다. ○ 명종 3년에는 굶주린 백성이 버린 아이를 남이 거두어 기르면, 영원히 그 사람에게 주라고 명했습니다. 옛 법을 다시 밝힌 것입니다. ○ 현종 3년 봄 정월에는 서울과 지방에 타일러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게 했습니다. 임금께 바른말을 하는 벼슬인 대사간 민정중의 말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 현종 12년 여름 4월에는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법을 세웠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간 사람은 서울 관청인 한성부에 알리고 공문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자식이나 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 숙종 갑신년에는 굶주린 백성 돕는 일을 맡은 높은 벼슬아치(당상) 민진후가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60일 동안 거두어 기른 10살 아래 아이는 그 자손까지 노비로 삼게 해 주십시오.” 자세한 것은 ‘진휼’ 조에 나옵니다. ○ 살펴보면, 이 다섯 조항은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납니다. 그런데 일을 맡은 관리들이 이것을 다시 밝혀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을 억눌러 천민으로 만드는 일에 대한 법은 아주 엄합니다. 그래서 거두어 기를 힘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거두지 못합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옛날 제가 경기도 가 되었을 때, 돌아가신 임금(정조)께서 영춘헌에서 저를 불러 만나셨습니다. 임금께서는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일에 대해 거듭 뜻을 밝히시며 안타깝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을 몰래 살펴보니 임금의 뜻을 받들어 실천하는 고을 원님()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수령들이 맡은 일을 다하려 하지 않은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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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함께 읽어요
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에 버려진 아이를 남이 거두어 살려 내면, 자식이나 노비로 삼게 허락한다. 아이 나이의 한도와 거두어 기른 달수의 한도는 모두 그때그때 정하는 규칙을 따른다.”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것은 3살 아래까지를 한도로 합니다. 큰 흉년이 잇따르면 8~9살로 하기도 하고, 15살로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양쪽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따릅니다. 그 아이와 나중에 낳은 자식까지 영원히 노비로 삼기도 합니다. 그 아이 한 몸만 부리기도 하고, 햇수를 정해 부리기도 합니다. 흉년이 얼마나 심한지, 얼마나 오래 길렀는지에 따라 모두 그때 정한 규칙을 따릅니다. 거두어 기른 지 60일이 안 되었는데 시작만 하고 끝을 맺지 못한 사람은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한을 채운 경우에는 양인이든 공천이든 사천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모두 거두어 기른 사람이 데리고 있게 허락합니다. 부모나 관청, 본래 주인은 찾아갈 수 없습니다. 부모나 친척이 3개월 안에 찾아가려면, 기르는 데 든 곡식을 두 배로 갚아야 데려갈 수 있습니다. 기한이 지나면 허락하지 않습니다. 살려 놓은 뒤에 싫다고 피하는 사람은 주인을 배반한 죄로 다스립니다. 힘으로 도로 빼앗는 사람은 법을 어긴 죄로 다스립니다. 공천과 사천의 관청이나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천과 사천이 서로 혼인한 사람이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자식으로 삼았는데, 양쪽 주인에게 마땅하지 않으면 그 아이를 양인이 되게 허락합니다. 거두어 기르는 사람은 아이의 나이와 생김새를 갖추어 관청에 알립니다. 관청은 아이의 부모와 , 이웃 사람들을 자세히 조사하여 진술을 받고, 을 만들어 줍니다. 살펴보면, 이것은 영조 임금 때 정한 것입니다. 공천과 사천이라도 본래 신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깊은 뜻이 어린아이를 살리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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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구걸하는 아이와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규칙은 을 따른다.” 구걸하는 아이는 10살을, 길가에 버려진 아이는 3살을 한도로 합니다. 구걸하는 아이는 에 보리를 거둘 때까지만 돕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풍년이든 흉년이든 규칙대로 돕습니다. 구걸하는 아이에게는 의 기준에 따라 양식을 줍니다. 버려진 아이는 떠도는 거지 여인 가운데 젖이 나오는 사람을 골라, 한 사람에게 두 아이씩 맡깁니다. 유모에게는 날마다 식구 수를 헤아려 쌀을 주고, 간장과 미역도 함께 줍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떠도는 거지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원해서 데려다 기르려는 사람이 있으면, 한 아이만 맡기고 쌀과 간장을 헤아려 줍니다. 구걸하는 아이나 버려진 아이를 스스로 원해서 거두어 기르는 사람은 모두 《속대전》의 규칙을 따릅니다. 살펴보면, 이것은 정조 계묘년(1783)에 펴낸 것입니다. 흉년이 아니더라도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것은 막지 않습니다. 다만 거두어 기르는 사람이 있으면 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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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런 모양으로 씁니다. “이 입안을 만들어 알린다. 아무 고을 아무 마을의 이호인이 올린 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마을에 떠도는 거지 여인이 아이를 안고 와서 묵다가 밤사이에 죽었습니다. 아이는 이제 젖을 잃어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려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늙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이 외로운 아이를 거두어 자식으로 삼아 기르는 것이 참으로 도리에 맞습니다.’ 이 남자아이를 살펴보니 나이는 두 돌쯤이고, 얼굴은 누렇고 여위었으며, 다른 흉터는 없었다. 이임 정득손, 이웃 김유복 등과 함께 까닭을 갖추어 알려 왔다. 관청 마당에서 을 받아 보니 모두 알린 그대로였다. 그래서 너에게 이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니, 영원히 자식으로 삼아라. 이 아이에게 혹시 아버지나 본래 주인이 있어서 뒷날 찾아와 알아보더라도 이렇게 한다. 3개월 안이면 기른 비용을 두 배로 갚게 한다. 3개월이 지나면 본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법전에 실려 있다. 이에 법전에 따라 입안을 만들어 주어 영원한 증거로 삼게 하니, 다투지 마라.” 노비로 삼아 기르려는 사람은 이 글을 알맞게 고쳐 씁니다. 나중에 낳은 자식까지 함께 노비로 삼는지, 그 아이 한 몸만 부리는지를 분명하게 써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부모가 있다면, 반드시 두 집이 주고받은 문서를 갖추어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에게 묻기
굶주리는 해가 아닌데도 아이가 버려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기를 사람을 찾아 맡기고, 먹을 양식은 관청이 보태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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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백성을 돕는 해에는 에서 양식을 보태 주어야 합니다. 보통 해에는 백성 가운데 기를 사람을 찾습니다. 그때 나선 사람이 스스로 먹고살 길이 없는 가난한 여인이라면, 이 직접 양식을 내어 도와야 합니다. 달마다 쌀 2를 주고, 여름에는 달마다 보리 4두를 줍니다. 아이가 두 돌이 될 때까지 이렇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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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버려지는 아이들 말고도, 서울의 도랑가에는 가끔 버려진 아이가 있습니다. 대개 부부가 아닌 사이에서 몰래 낳은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이치에 따르면, 부모의 죄가 그 아이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도 거두어 기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이 자식이나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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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판은 휴담 국역을 바탕으로 초등학생이 혼자 읽을 수 있게 다시 쓴 글이며, 쓴 사람과 다른 검토자가 원문과 대조해 확인했습니다. 원전 그대로의 글은 「원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