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판 · 중학생·고1이 혼자 읽는 글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 · 휴담 국역을 중학생 눈높이로 다시 썼습니다 · 도서관에서 원문 보기 ↗
선집 대목: 공감에 대하여 · 보이지 않는 손(도덕감정론)
이 글을 읽기 전에
1759년, 스코틀랜드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펴낸 『도덕감정론』의 두 대목입니다. 스미스는 사람이 남의 행동을 어떻게 옳다, 그르다 판단하게 되는지 밝히려고, 남의 처지를 상상해 함께 느끼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앞 대목은 그 출발점인 공감을 다루고, 뒤 대목은 『국부론』(1776)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나오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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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도덕감정론 · 토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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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sympathy)에 대하여
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보아도, 사람의 본성에는 분명히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들 때문에 사람은 남의 운명에 마음을 씁니다. 남이 행복한 것을 보는 즐거움 말고는 얻는 것이 없는데도, 남의 행복을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나 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남의 비참한 처지를 직접 보거나 아주 생생하게 떠올릴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남의 슬픔 때문에 자주 슬퍼진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라, 예를 들어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감정은 사람 본성의 다른 타고난 들처럼, 덕 있고 인정 많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이 감정을 가장 섬세하게 느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흉악한 악당, 사회의 법을 가장 뻔뻔하게 어기는 사람에게도 이 감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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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직접 겪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느낌을 받는지 알려면, 우리가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 무엇을 느낄지 떠올려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형제가 위에 있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한 동안에는 우리 감각이 그의 고통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감각은 우리를 우리 몸 밖으로 데려간 적이 없고, 데려갈 수도 없습니다. 그의 감각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력 덕분입니다. 상상력도 다른 방법으로 돕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그의 처지에 있다면 우리 감각이 어떨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상상력이 본뜨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이지, 그의 감각 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상력으로 우리 자신을 그의 처지에 놓습니다.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다 겪는다고 떠올립니다. 말하자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어느 정도 그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감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정도는 약해도 그것과 아주 다르지 않은 무언가를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의 괴로움이 이렇게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마침내 그 괴로움이 우리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느끼는 것을 생각하며 떨고 몸서리칩니다.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에 실제로 빠지면 몹시 슬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다고 상상만 해도 어느 정도 같은 감정이 생깁니다. 그 감정은 상상이 생생한지 흐릿한지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집니다.
이것이 남의 비참함을 함께 느끼는 마음이 생겨나는 근원입니다. 곧 우리는 상상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자리를 바꿈으로써, 그가 느끼는 것을 떠올리거나 그것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 점이 그 자체로 충분히 뚜렷하지 않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일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의 다리나 팔을 내리치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저절로 움츠러들며 자기 다리나 팔을 뒤로 뺍니다. 그리고 정말 내리치면 우리도 어느 정도 그것을 느끼고, 맞은 사람처럼 아파합니다. 느슨한 밧줄 위에서 춤추는 사람을 구경하는 군중은 저절로 몸을 비틀고 꼬며 균형을 잡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그 처지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신경이 예민하고 몸이 약한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합니다. 거리의 거지들이 드러낸 상처와 를 보면, 자기 몸의 같은 자리가 가렵거나 불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가엾은 사람들의 비참함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은, 다른 어느 곳보다 자기 몸의 바로 그 자리에 영향을 줍니다. 그 두려움은 이런 상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정말 눈앞의 그 가엾은 사람이라고 해 봅니다. 그리고 자기 몸의 그 자리가 똑같이 비참하게 다쳤다면 어떤 고통을 겪을지 떠올리는 것입니다. 몸이 약한 그들에게는 이 상상의 힘만으로도 그런 가려움이나 불편함이 생기기에 충분합니다. 몸이 아주 튼튼한 사람들도 짓무른 눈을 보면 자기 눈이 꽤 따끔거린다고 합니다. 이것도 같은 까닭에서입니다. 눈이라는 기관은 가장 튼튼한 사람의 것이라도, 가장 약한 사람의 다른 어느 부위보다 섬세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나 슬픔을 일으키는 처지만 우리의 을 불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에게 어떤 일로 어떤 이 생기든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주의 깊게 지켜보는 사람의 가슴에도 비슷한 감정이 솟아납니다. 비극이나 모험 이야기에서 마음이 가는 주인공이 위기에서 구출되면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그들이 괴로울 때 우리가 느끼는 슬픔만큼 진실합니다. 그들의 불행을 함께 느끼는 마음이 그들의 행복을 함께 느끼는 마음보다 더 진짜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려울 때 저버리지 않은 충실한 친구들에게 그들이 품는 고마움을 함께 느낍니다. 또 그들을 해치고 저버리고 속인 배신자들에게 그들이 품는 분노에 진심으로 함께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정념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감정은 늘 한 가지와 맞아떨어집니다. 그 일을 자기 일로 여겨 볼 때, 고통받는 사람이 느끼리라고 상상하는 감정입니다.
연민과 동정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라는 말도 원래 뜻은 아마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이든 그것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나타내는 데 써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 그저 다른 사람의 어떤 감정을 보기만 해도 생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때는 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곧바로 번져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당사자에게 무엇이 그 정념을 일으켰는지 알기도 전에 말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표정과 몸짓에 슬픔이나 기쁨이 강하게 드러나면, 보는 사람도 곧바로 어느 정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슬픔이면 괴로운 감정을, 기쁨이면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웃는 얼굴은 보는 누구에게나 즐거운 대상입니다. 반대로 슬픈 얼굴은 우울한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서나, 어떤 에나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정념은 겉으로 드러나도 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알기 전에는,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고 그 정념에 맞서고 싶게 만듭니다. 화난 사람이 사납게 굴면, 우리는 그의 적들보다 그 사람 자신에게 더 화가 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처지를 우리 일로 여길 수 없고, 그 일이 일으키는 정념 비슷한 것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내는 상대들의 처지는 똑똑히 보입니다. 그토록 성난 상대에게 그들이 어떤 폭력을 당할지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두려움이나 분노에 쉽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들을 그토록 위험에 빠뜨린 듯한 그 사람에게 맞서는 편에 섭니다.
슬픔과 기쁨의 모습만 보아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비슷한 감정이 생긴다면,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가 보는 그 사람에게 어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닥쳤다는 대강의 생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기쁨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에 충분합니다. 슬픔과 기쁨의 영향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끝납니다. 이 감정들의 표현은 분노의 표현과 다릅니다. 우리가 마음을 쓰게 되는 다른 사람, 그것도 그와 가 맞서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닥쳤다는 대강의 생각만으로도, 그 일을 겪은 사람에게 얼마쯤 마음이 갑니다. 그러나 누가 화날 일을 당했다는 대강의 생각만으로는 그 사람의 분노에 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이 에 끼어드는 것을 더 꺼리라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까닭을 알기 전까지는 오히려 그 정념에 맞서는 편에 서도록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에 대한 조차, 그 까닭을 알기 전에는 늘 아주 불완전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괴로움만 드러내는 막연한 을 들어 봅시다. 그것은 뚜렷하게 느껴지는 실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의 처지를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과, 그에게 공감하려는 마음가짐이 조금 생길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묻는 것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입니다. 이 물음에 답을 듣기 전까지 우리는 불편합니다. 그의 불행에 대한 막연한 생각 때문에 불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지 이리저리 짐작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느라 더 불편합니다. 그래도 그를 함께 느끼는 마음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 그 자체를 보는 데서보다, 그 정념을 일으키는 처지를 보는 데서 생깁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을 위해, 그 사람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한 정념을 느낍니다. 우리가 그의 처지에 우리 자신을 놓으면, 그 정념이 우리 가슴속에 상상으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그의 가슴에 생기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뻔뻔하고 무례한 행동에 대신 얼굴을 붉힙니다. 그 자신은 자기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터무니없이 행동했다면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 시대의 생각
사람은 언젠가 죽는 존재라서 온갖 재앙을 겪습니다. 그 가운데 을 잃는 것은, 사람다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단연 가장 끔찍해 보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이 마지막 비참함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깊은 연민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 빠진 가엾은 사람은 아마 웃고 노래하며, 자기의 비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며 느끼는 괴로움은, 고통받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비친 것일 수 없습니다. 지켜보는 사람의 동정은 전적으로 이런 생각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가 그 불행한 처지에 빠진다면 무엇을 느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지금의 이성과 판단력으로 그 처지를 바라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마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병의 고통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말하지 못하는 아기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 어머니의 괴로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아기가 겪는 고통을 떠올리며, 어머니는 아기가 정말로 무력하다는 사실에 두 가지를 보탭니다. 하나는 그 무력함을 아는 자기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아기의 병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자기 두려움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어머니는 자기 슬픔을 위해 가장 완전한 비참함과 괴로움의 모습을 그려 냅니다. 그러나 아기는 지금 이 순간의 불편함만 느낄 뿐이고, 그 불편함은 결코 클 수 없습니다. 앞날에 대해서라면 아기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덕분에, 아기는 두려움과 불안을 막는 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괴롭히는 것들입니다. 아기가 어른이 되면, 이성과 철학이 그것들을 막으려 애써도 헛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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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은 사람에게도 합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을 기다리는 무서운 앞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은 놓치고, 주로 우리 감각을 건드리는 것들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것들은 그들의 행복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비참하다고 생각합니다. 햇빛을 빼앗기는 것, 삶에서, 사람들과 나누던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차가운 무덤에 누워 썩어 가며 땅의 파충류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는 누구도 떠올리지 않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가장 아끼던 친구와 친척들의 사랑에서, 그리고 기억에서조차 거의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겪은 이들에게는 아무리 많이 마음을 써도 지나치지 않다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이제 그들이 모두에게 잊힐 위험에 놓였으니, 함께 느끼는 마음을 두 배로 바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기리며 헛된 를 바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불행을 떠올리는 슬픈 기억을 일부러 살려 두려고 애씁니다.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우리의 공감이 그들에게 아무 위로도 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재앙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모든 괴로움을 덜어 주는 친구들의 아쉬움과 사랑과 슬퍼함도 그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비참하다는 우리의 느낌을 더 키울 뿐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의 행복은 이 모든 일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고 그들의 깊은 이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상상은 그들의 상태에 끝없이 어둡고 쓸쓸한 우울함이 있다고 여깁니다. 이 생각은 전적으로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에, 그 변화를 의식하는 우리 마음을 보탭니다. 우리 자신을 그들의 처지에 놓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살아 있는 우리 영혼을 그들의 숨 없는 몸에 깃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경우 우리 감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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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내다보며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상의 착각 때문입니다. 죽고 나면 우리에게 아무 고통도 줄 수 없는 일들인데도, 그것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동안 비참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 본성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가 생깁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행복에는 큰 독이지만, 사람들이 를 저지르지 못하게 크게 막아 줍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괴롭히고 움츠러들게 하면서도, 사회는 지키고 보호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이 원리에 영향을 받는 것은 그런 하찮은 물건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삶과 공공의 삶 모두에서, 가장 진지하고 중요한 일을 좇게 하는 숨은 동기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 있습니다. 하늘이 노하여 그에게 을 내렸습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면서 부자의 처지를 부러워합니다. 아버지의 오두막은 자기가 살기에 너무 좁다고 여기고, 궁전에서 살면 더 편하리라고 상상합니다. 걸어 다니거나 말을 타는 피로를 견뎌야 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윗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마차를 타면 덜 불편하게 다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가 타고나기를 게으르다고 느낍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손으로 하는 일을 줄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인을 많이 거느리면 수고를 크게 덜리라고 판단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갖추면 흐뭇하게 가만히 앉아 쉬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처지의 행복과 평온을 생각하며 즐거워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행복이 멀리서 아른거리는 모습에 홀립니다. 그것은 그의 상상 속에서 더 높은 존재들의 삶처럼 보입니다. 거기에 이르려고 그는 평생 부와 를 좇는 데 자신을 바칩니다. 이것들이 주는 편리함을 얻으려고, 그는 첫해, 아니 첫 달에 이미 큰 고생을 견딥니다. 그것들이 없어서 평생 겪었을 몸의 피로와 마음의 불안보다 더 큰 고생입니다. 그는 어떤 힘든 직업에서 을 나타내려고 애씁니다.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밤낮으로 일해, 모든 경쟁자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추려 합니다. 다음에는 그 재능을 세상에 알리려고 애쓰며, 똑같이 부지런하게 온갖 일자리를 구합니다. 그러려고 그는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춥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섬기고, 업신여기는 사람에게 굽실거립니다.
그는 평생 꾸며 낸 우아한 휴식이라는 생각을 좇지만, 끝내 그것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언제든 자기 힘으로 누릴 수 있는 진짜 평온을 희생합니다. 아주 늙어서 마침내 그것을 얻는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위해 버린 소박한 안정과 만족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삶의 마지막 찌꺼기 같은 시간입니다. 그의 몸은 고생과 병으로 지쳐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수많은 상처와 실망의 기억으로 쓰라리고 어지럽습니다. 적들이 부당하게 굴어서, 또는 친구들이 배신하고 은혜를 잊어서 겪었다고 그가 생각하는 일들입니다. 그제야 그는 부와 가 하찮은 쓸모를 지닌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사람의 보다 몸을 편하게 하거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데 더 알맞지 않습니다. 또 족집게 상자처럼, 주는 이로움보다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더 번거롭게 합니다. 둘 사이에 다른 진짜 차이는 없습니다. 한쪽의 편리함이 다른 쪽보다 좀 더 눈에 띈다는 것뿐입니다. 높은 사람들의 궁전, 정원, 마차, 거느린 사람들은 그 편리함이 누구에게나 뚜렷이 보이는 것들입니다. 주인이 그것들의 쓸모가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쓸모를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을 통해, 그것들이 주인에게 주도록 만들어진 만족을 함께 즐기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이쑤시개, 귀이개, 손톱 깎는 기계 같은 장신구의 신기함은 그리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편리함도 아마 똑같이 클 수 있지만, 그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가진 사람의 만족에 그리 쉽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부와 높은 지위의 화려함보다 의 대상으로 덜 그럴듯합니다. 부와 높은 지위가 앞서는 점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부와 는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채워 줍니다. 이 마음은 사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쓸쓸한 섬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는 궁전과, 족집게 상자에 흔히 든 작은 편의품들 가운데 무엇이 더 행복에 보탬이 될지 따져 볼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면 견줄 것도 없습니다. 이 경우에도 다른 모든 경우처럼, 우리는 늘 당사자의 감정보다 지켜보는 사람의 감정에 더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자기 처지가 자기에게 어떻게 보일지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더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켜보는 사람이 왜 부자와 높은 사람의 처지를 그토록 감탄하며 우러러보는지 따져 봅시다. 그들이 누린다고 여겨지는 더 큰 편안함이나 즐거움 때문은 그리 아닙니다. 그 편안함과 즐거움을 늘리려고 만든 수많은 정교하고 우아한 장치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정말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행복의 수단을 더 많이 가졌다고 상상할 뿐입니다. 그가 감탄하는 주된 까닭은, 그 수단들이 원래 목적에 맞게 재치 있고 솜씨 좋게 짜여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병으로 기운이 빠지고 늙어 지치면, 높은 지위가 주던 헛되고 텅 빈 돋보임의 즐거움은 사라집니다. 이런 처지의 사람에게 그 즐거움은, 예전에 그를 매달리게 했던 고된 추구를 더는 권하지 못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야망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영영 사라진 젊은 날의 편안함과 느긋함을 헛되이 아쉬워합니다. 그것은 얻고 나서도 아무 진짜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을 위해, 그가 어리석게 희생한 즐거움입니다. 누구든 이나 병 때문에 자기 처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행복에 정말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될 때입니다. 그럴 때 높은 지위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때 비로소 권력과 부는 제 모습대로 보입니다. 몸에 하찮은 편리함 몇 가지를 주려고 만든, 거대하고 번거로운 기계입니다. 그 기계는 아주 정교하고 섬세한 용수철들로 되어 있어서, 몹시 마음을 졸이며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든 산산조각 나서, 그 잔해로 불운한 주인을 짓누를 수 있습니다. 권력과 부는 평생을 고생해야 세울 수 있는 거대한 건물입니다. 그 건물은 언제든 그 안에 사는 사람을 덮칠 듯 위태롭습니다. 서 있는 동안에는 작은 불편함 몇 가지는 막아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절의 더 매서운 날씨는 하나도 막아 주지 못합니다. 여름 소나기는 막아 주지만 겨울 폭풍은 막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를 늘 예전만큼, 때로는 예전보다 더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에, 병과 위험과 죽음에 드러내 놓습니다.
병들거나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는 누구나 이런 우울한 철학에 익숙해집니다. 이 철학은 사람이 바라는 큰 대상들을 이렇게 완전히 깎아내립니다. 그러나 몸이 좋고 기분이 좋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을 더 즐거운 쪽에서 바라봅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고 잘될 때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으로 넓게 퍼져 나갑니다. 그때 우리는 높은 사람들의 궁전과 살림에 가득한 편리함의 아름다움에 반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얼마나 잘 맞추어져 있는지 감탄합니다. 그들의 편안함을 늘리고, 모자람을 미리 막고, 바람을 채워 주고, 가장 하찮은 욕심까지 즐겁게 해 주도록 짜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줄 수 있는 진짜 만족을, 그것만 따로 떼어 생각해 봅시다. 그 만족을 늘리도록 맞추어진 짜임새의 아름다움과 떼어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만족은 언제나 더없이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눈으로 그것을 보는 일이 드뭅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 만족을, 그것을 만들어 내는 질서와 자연스럽게 뒤섞습니다. 곧 의 규칙적이고 조화로운 움직임, 그 기계나 살림 체계와 뒤섞는 것입니다. 이렇게 뒤섞어 보면, 부와 의 즐거움은 웅장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상상력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으려고 우리가 기꺼이 들이는 모든 고생과 걱정이 충분히 값어치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이 우리를 이렇게 속이는 것은 잘된 일입니다. 사람들의 을 일깨우고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속임수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땅을 갈고, 집을 짓고, 도시와 국가를 세우게 한 것도 이것입니다. 사람의 삶을 고귀하고 아름답게 하는 온갖 학문과 기술을 발명하고 발전시키게 한 것도 이것입니다. 이것이 지구 전체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연의 거친 숲을 살기 좋고 기름진 들판으로 바꾸었습니다. 길 없고 메마른 바다를 새로운 먹을거리의 곳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여러 민족을 잇는 큰 길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노동 덕분에, 땅은 타고난 기름짐을 두 배로 늘려 더 많은 주민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거만하고 인정 없는 가 자기 넓은 밭을 바라본다고 해 봅시다. 그는 형제들에게 무엇이 모자란지는 생각하지 않고, 거기서 자라는 수확을 상상 속에서 혼자 다 먹어 치웁니다. 그러나 그래 봐야 소용없습니다. '눈이 배보다 크다'는 소박하고 흔한 속담이 그보다 더 잘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위는 그의 엄청난 욕심만큼 크지 않고, 가장 가난한 농부의 위보다 더 많이 담지도 못합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먹는 적은 양을 아주 정성껏 마련하는 사람들, 그 적은 양을 먹을 궁전을 짓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높은 사람의 살림에 쓰이는 온갖 자질구레한 장신구와 사치품을 대 주고 손질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치와 변덕 덕분에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몫을 얻습니다. 그의 인정이나 정의에 기대했다면 헛일이었을 몫입니다. 땅에서 나는 것은 언제나 그 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주민을 거의 먹여 살립니다. 부자들은 그 더미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고를 뿐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보다 조금 더 먹을 뿐입니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기 편리함뿐입니다. 수천 명을 부리며 노리는 단 하나의 목적도 헛되고 끝없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이룬 모든 개선의 열매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눕니다. 그들은 에 이끌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거의 고르게 나누게 됩니다. 땅을 모든 주민에게 똑같이 나누었다면 이루어졌을 나눔과 거의 같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뜻하지도 알지도 못한 채 사회의 이익을 늘리고, 사람이 늘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합니다. 가 땅을 소수의 거만한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그 나눔에서 빠진 것 같은 사람들을 잊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도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의 제 몫을 누립니다. 사람의 삶에서 진짜 행복을 이루는 것을 따져 봅시다. 그 점에서 그들은 자기보다 훨씬 위에 있는 듯한 사람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평화에서는 삶의 모든 계층이 거의 같은 높이에 있습니다. 길가에서 햇볕을 쬐는 거지도 왕들이 얻으려고 싸우는 그 안정을 누립니다.
중등판은 휴담 국역을 바탕으로 중학생·고1이 혼자 읽을 수 있게 다시 쓴 글입니다. 핵심 개념어는 바꾸지 않고 낱말 돋보기로 풀었으며, 쓴 사람과 다른 검토자가 원문과 대조해 확인했습니다. 원전 그대로의 글은 「원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